‘제2의 암(癌)마을’ 막으려면
  • 모용복기자
‘제2의 암(癌)마을’ 막으려면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멸 위기에 놓은 농촌마을
개발-보존 놓고 갈등 심화
익산 장점마을 癌마을 공포
석포제련소 환경 오염 갈등
농촌마을 해체 슬픈 현주소
기업유치·경제 중요할지라도
주민건강에 우선할 수 없어
농촌 마을공동체 유지 위해
환경오염 단호한 조치 필요
모용복 기자
며칠 전 경주시 안강읍의 한 마을을 지나간 적이 있다. 11월로 접어든 들녘과 산은 늦가을의 마지막 남은 열기를 토해내려는 듯 어디를 가나 붉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이 마을에서는 가을이 없었다. 우후죽순 들어선 축사 때문이다. 요즘 농촌지역 어디를 가나 마을에 으레 한두 동의 축사는 있게 마련이지만 이 마을은 지근거리를 두고 대형축사가 여러 채 들어서 있었다. 가을풍경 실종은 그래도 다행이다 싶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수 백 미터까지 퍼져나가는 가축분뇨 악취로 인해 마을주민들이 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곤란할 것을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오랜 아파트 생활을 접고 어디 한적하고 공기 좋은 농촌마을에서 전원생활을 즐겨 보리라던 허황(虛荒)된 꿈에서 깨어나게 해준 것도 축사였다. 지난해 여름 업자의 소개로 현재 살고 있는 읍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을 찾았다가 가축 분뇨 악취를 맡고선 깨끗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꿈꾸던 이상향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축사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공기 좋은 곳을 원하면 차라리 고기를 먹지 말든지, 고기를 즐기려면 분뇨를 참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흩어져 있는 축사를 한 군데 모아놓고 관리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안강 마을 방문길에 동승한 선배는 말했다. 그러면 악취로 인한 마을주민과의 갈등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효율적인 축사관리도 가능해 축산농가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실현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각기 사는 환경과 생각이 천차만별인 농가를 과연 인위적으로 한 군데 모을 수가 있을지, 또 그 많은 축사들이 들어설 부지는 무슨 수로 조성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 가축분뇨 악취로 인한 농가와 주민들의 해묵은 갈등은 농촌의 존립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다. 해법은 없는 것일까?

급속한 인구 고령화 현상으로 현재 대부분 지방도시가 소멸위기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해 각 지자체에서는 온갖 당근책을 제시하며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래서 공장을 돌리는데 있어 어지간한 불·탈법에는 애써 눈길을 피하기 일쑤며, 심지어 너무 관대한 나머지 업자와 공무원이 유착이 돼 놀아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연초박(담뱃잎 찌꺼기)을 가공해 퇴비로 만드는 비료공장에서 나온 발암물질 때문에 주민 22명이 암(癌)에 걸리고 이 중 14명이 숨진 전북 익산의 장점마을. 이 ‘암마을’의 비극도 그 배경에는 지자체의 묵인과 유착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공장 전(前)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연초박 불법 가공을 단속 나온 시청 직원들이 공장을 둘러볼 생각은 않고 사무실에만 앉았다 가버리거나 심지어 업체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금품 로비까지 벌였다고 한다. 밭일을 하던 주민들이 갑자기 원인 모를 두통과 구토 증세를 호소하며 쓰러져 나가고 하천에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떠오르는데도 관리당국이 무대책으로 일관한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장점마을 만의 비극이 아니다. 연초박을 퇴비로 쓰기 위해 KT&G로부터 반입한 곳이 전국 곳곳에 있다고 하니 ‘암마을’의 공포는 언제든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최근 한 지역매체에 따르면 경북지역 3개 업체에서도 500여톤 가량의 연초박이 반입된 것으로 알려져 공장 인근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소식이다. 업체들마다 연초박 용도와 가공 공정이 각기 달라 지레 겁을 먹고 부산을 떨 필요까지야 없다손 치더라도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주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관리당국이 철저한 전수조사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경북의 대표적인 청정지역인 봉화의 한 마을에서 제련소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개발과 보전 사이의 딜레마에 빠진 농촌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대형서점 영풍문고로 유명한 영풍그룹이 1970년 봉화군 석포면 낙동강 최상단에 건설한 석포제련소는 아연생산규모 국내 2위,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4위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제련공장이다. 50년 전이라면 공장부지가 널리고 널렸을 텐데 왜 굳이 심산유곡(深山幽谷)인 이곳까지 들어와 공장을 세운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난 2월 합동단속 결과 이 공장에서 폐수를 불법으로 배출하고 공장 내 지하수에서 1급 발암물질인 카드뮴 농도가 기준치보다 수 만 배 넘게 검출되는 등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가 드러나자 환경부가 올해 5월 조업정지 120일의 행정처분을 내린 바 있다.

환경오염 탓인지 공장 주변의 나무들까지 말라죽어 주민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공장폐쇄를 촉구하는 행동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장폐쇄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고 하니 무슨 일인가. 이들은 제련소가 문을 닫으면 그나마도 젊은이와 어린이가 있는 축인 석포면이 사라지게 되고 그로 인해 인구 3만의 봉화군도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1000여명의 근로자와 가족들, 그리고 제련공장에 생계를 대고 살아가는 주민들 입장에선 공장폐쇄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아 아닐 수 없다. 기업이 수많은 불·탈법을 일삼으면서도 지금까지 건재해온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공장폐쇄를 요구하는 쪽도 주민이요, 반대하는 쪽도 주민이다. 기업과 주민의 갈등이 주민들 간의 대립으로 비화된 것이다. 현재 개발과 보전 사이에 놓인 많은 농촌지역에서 이러한 갈등이 노정(露呈)되고 있다. 지역 소멸위기에 놓인 지자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경북도가 환경부의 행정처분 요구를 반년이 지나도록 미뤄오다 지난 20일 환경부 행정처분이 적정한지 법제처의 최종 판단을 받아보기로 한 것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엄연한 지방의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기업유치와 경제가 중요하다 해도 주민의 건강과 생활환경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주민이 있고서야 기업이 있고 지방도 있는 것이다. 지자체가 관리를 게을리 하면 장점마을의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암마을’의 공포는 지역소멸을 가장 가속화시키는 암적 존재일지 모른다. 당장은 경제적 손실이 따를지 몰라도 마을공동체 유지와 농촌의 미래를 생각하면 환경에 대한 단호한 조치는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축사의 악취 정도는 오히려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