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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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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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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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의 음악을 들으며
-여행의 반대말이 뭘까요?
지난 가을, 부산아시아영화학교의 강사로 초청되어 ‘여행의 거짓과 영화적 진실’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비교과 시민강좌였기 때문에 수강생들의 연령대나 직업, 그리고 여행과 영화를 사랑하는 방식들은 다채로웠다. 무엇보다 하루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시간에 모여 이미 보았던 혹은 보고 싶었던 영화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영화 전공자도 아니었고, (여행 책을 두 권 쓰긴 했지만) 여행에 관해서라면 풋내기에 불과했기에 여섯 번의 강좌를 수락한 것은 다소 무책임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강의를 하고자 한 데에는 강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과 영화라는 주제를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내가 첫 시간에 던진 화두는 ‘여행의 반대말이 뭘까요?’였다. 이런 질문은 정답이 있는 부류가 아니다. 나 역시도 제대로 된 답을 생각하지 않고 던진 것이었고, 즉흥적인 물음에는 생생한 사고(思考)가 뒤따르기 마련이기에 이런 식의 수업을 평소 즐기기도 했다. 강의실 속에 어떤 생각이라는 것이 모이기 시작하면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고 단숨에 녹아버릴 수도 있다. 선생이라는 위치는 이런 생각의 눈덩이를 이 책상에서 저 책상으로 옮겨다놓는 존재라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고 어쨌거나 한 수강생의 답변으로부터 작은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상이 아닐까요?”

이런 식의 대답은 곤란하다. 에둘러가는 것 없이 곧장 질문의 핵을 찌르는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정확하고 아찔하고 매력적인 대답이었다.

“멋진걸요.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수강생들은 각자의 생각을 정리했고, 나는 그들의 생각을 칠판에 적어나갔다. 화이트보드 위로 어디에도 없는 근사한 여행론이 완성되고 있었다.



-삶은 여행

여행은 이타카 해를 항해하는 트로이의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시작된 개념일까. 신대륙을 찾기 위한 콜럼버스로 근원을 찾으면 되는가. 마르코폴로에게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아니, 나는 조금 더 주관적인 세계로 그들을 초대한다. 최초의 여행에 대한 기억, 최초라는 매혹과 최초라는 아픔, 그리고 최초의 일상과 최초의 사랑 같은, 기억하기 힘들지만 분명히 지나쳤을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수강생들은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반대말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행여’라고 말하려다 썰렁해질 것이 두려워 조금 진지해지기로 했다.

“언젠가 끝나는 건 여행이고, 끝나지 않는 것이 여행의 반대말 같습니다.”

이 말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짓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이건 이상은 13집의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 속에 등장하는 가사였다. 정확한 가사는 이렇다.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걸.’(이상은, <삶은 여행>)

무엇보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여행론은 다름 아닌 이 노래의 멜로디다. 무덤덤하지만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는 의외의 흔들림이 느껴진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아닌 삶의 궤적 앞에서 번뇌하는 한 영혼의 흔들림이 이상은의 숨 속에 신비롭게 녹아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수업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각자의 여행관은 짙어졌다. ‘여행의 거짓과 영화적 진실’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여행의 거짓에 대해서는 무엇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들 각자만의 여행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내가 아는 영화의 짧은 지식을 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묘한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고,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눈빛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제 마지막 단계를 남겨두었다. 당신이라는 여행의 출발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퇴근을 앞둔 회사의 책상 앞이 될 수도 있고, 소풍 전날 밤잠을 설치며 환상을 가졌던 침대 위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탄산음료를 처음 맛본 슈퍼 앞이 될 수도 있고, 더 멀리 가선 내가 처음 만난 강아지의 눈앞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나는 더 작은 곳으로, 엄마의 뱃속으로, 그 우주의 물컹한 느낌 안으로, 면으로, 선으로 점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최근 16집을 발매한 이상은을 듣다가 1집으로까지 회귀하게 된 건 이런 이유와도 닿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1집 앨범의 첫 곡이 ‘Happy Birthday’라는 것이 유난히도 반갑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이상은, <언젠가는>)

이상은은 언젠가부터 여행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그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과 이별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의 회환이 될 수 있고, 현실의 부정이 될 수도 있으며, 다가올 미래를 향한 덤덤한 기다림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모두 반대의 색을 가질 수 있다. 중요한건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노래들은 언제나 음악을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행을 음악하고 있다는 아름다움이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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