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은 언젠가 줄줄이 福을 불러줍니다
  • 경북도민일보
성실은 언젠가 줄줄이 福을 불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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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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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과자공장부터 트럭조수까지
수백 가지 일 닥치는대로 해
그덕에 다시 돌아온 신광서
큰집 짓고 행복 즐기는 중
유기식 씨 부부가 집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1987년 유기식 씨가 축산일을 하고 있다.
유기식 씨 부부가 딸들과 함께 가족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유기식 씨 부부 여행 모습.

유기식의 포항이야기<9>

“일만 죽어라고 했죠. 그래도 열심히, 성실히 일하다보면 노년의 축복은 반드시 보장되는 것이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밥 먹고 살기위해 무작정 고향 신광면 흥곡1리를 떠난 지 30여년만인 1997년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떠날 땐 빈털터리였지만 고향으로 돌아올 땐 소 100마리(지금은 아니지만)와 사랑스런 아내, 딸 셋을 데리고 남부러울 게 없었다. 이게 소처럼 우직하게 땀만 흘려 온 ‘성실’이 채워 준 복이다.

1949년, 한국전쟁 직전 태어나 집은 당시 신광의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작은 논 밭떼기로 겨우 먹고살기 바빴다. 특히나 일본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정의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졌다. 그래서 형들과 함께 초등학교(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집을 떠났다. 먼저 신광 인근의 경주 안강과 기계 등을 전전하며 온갖 닥치는 일을 다 했다. 기술을 배우려고 떠났지만 대부분 월급은 고사하고 겨우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해 주는 정도였다. 그때는 다 그랬다.

그렇게 ‘입대 영장’을 받기 전 까지 안강 사방리 ‘진선미제과소’라는 과자공장에서부터 시작한 일자리 유랑은 정말 길고 고단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추억이지만 먹고, 잘 곳이 없어 길게는 1~2년 짧게는 며칠씩 수십, 아니 수백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과자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도 사장 친척이 들어오면 그 마저도 (일자리) 빼앗기고 안강 육통리 목장에서 젖소 젖을 짰는데 어려서 손이 작아 그것도 여의치 않자 부산으로 가서 세탁소, 목공소 일을 했다. 물론 월급도 없이. 그러다가 부산으로 배달 온 트럭운전사 아저씨를 따라 대구로 가서 트럭조수를 하며 운전을 배웠다.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으로 그 땐 면허증도 없이 대구에서 창녕 밀양 등으로 다마내기(양파)를 실어 날랐다. 어느 정도 운전이 숙달되고 식비라도 벌 수 있을 때 어머니가 방위소집 영장이 나왔다고 알려와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때가 22살 때였다.


대구 용접기술학원에서 기술을 배우다 친척의 소개로 여수 남해화학비료공장에서 2년간 짧게 배운 용접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었다. 공장 설비용접 다시 부산 대한조선공사로 가서 철골, 용접 등쇠붙이 다루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 중년까지 우리 가정을 먹고살리는 기술이었다. 일용직이다 보니 부산 일을 마치고 강원도 묵호항에 컨베이어 교체라는 장기물량이 주어져 그 당시 2만5000원을 주고 1년 사글세방을 얻었다. 그때 결혼 적령기도 됐고 기계 봉계리에 사는 처녀 김주석과 선을 보았다. 동생들 끼리 알고 지내 소개를 받고 인사를 하기위해 집으로 찾아가니 아무도 없어 나이 과년한 처녀가 차려주는 밥만 먹고 있는데 장인 될 분이 오시더니 “술담배 안하고 성실해 보이지만 가진 게 너무 없어 딸 고생시킬 것 같다”며 혼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스물일곱에 노처녀 소리 듣던 아내는 제가 마음에 들었던지 제가 돌아 온 후 장인께 “아부지요 딸 노처녀로 늙어 죽게 할 겁니까, 사람 좋으면 된다고 했지요, 저 사람 여물어 보이니 결혼하게 해주이소, 아버지한테 돈 달라소리 안할게요”라고 태어나 처음 대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선본지 두달만에 내가 29살, 아내가 27살때 12월, 당시 일터가 있던 강원도 묵호 연탄공장 옆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후에도 직장 따라 일용직 유랑은 계속되어 울산·부산 등을 돌며 선박용접을 할 즈음, 울산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신광에 쌀을 사러 왔다가 우연히 본 빈 점포가 저의 발목을 잡았다. 그간 배운 기술로 자전거 조립, 경운기와 리어카 용접을 하면 될 것 같아 쌀 한가마니, 미역 한 장 달랑 들고 귀향했다.

낮에는 점포에서 일하고, 밤에도 단칸방 세딸들이 자는 머리맡에 이불을 깔아 놓고 자전거를 조립했다. 낮잠 한번 자지 못하고. 그후 신광초등학교 냉수분교가 폐교돼 아이들 교육 때문에 포항에 나가 잠시 건강원과 슈퍼마켓도 해봤지만 몇 년 만에 다시 흥곡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축산일을 했다.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천성때문인지 소는 금새 불어나 100마리까지 키울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건강과 나이 때문에 30여두의 소만 키우지만 올해는 큰 집을 새로 지었다. 행복은 노력하는 만큼 돌아온다. 그게 제가 70평생 살아온 인생의 철학이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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