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무문(大盜無門)-사라진 의적신화
  • 모용복기자
대도무문(大盜無門)-사라진 의적신화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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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도둑이지만 훔친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도둑을 의적·대도라고 부른다
빈부격차 심하고 혼란할 수록
민간에 의적이야기 많이 회자
현대 의적이라 불리는 조세형
81세에 좀도둑질 하다 철창행
의적신화 종말을 고하는 弔鐘
큰도둑들 조종은 언제 울릴지
모용복 기자
비록 도둑이기는 하나 훔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로운 일을 행하는 도둑을 의적(義賊)이라 일컫는다. 비슷한 말로 대도(大盜)가 있는데, 작은 물건 대신 큰 물건을 훔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이나 공익을 위해 도적질을 하는 도둑을 말한다.

유년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의적에 관한 무용담을 들으며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뜬다. 불의(不義)한 권력층을 마음껏 농락하고 단죄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요 표상이다. 힘없고 가난한 민중은 의적의 활약상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며 잠시나마 고된 삶을 잊는다. 그래서 신분과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의적 전설은 민간에 더 많이 회자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과정에 이야기가 적층되면서 미화되기도 한다.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전우치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적들이다. 실존 인물인 이 도적들이 실제로 의로운 일을 행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헌에 의하면 이들이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등 의로운 일과는 거리가 먼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많은 경우 이야기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살이 붙고 뼈가 더해져 의적의 무용담으로 미화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민중의 보상심리(報償心理·compensation)가 소망하는 방향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지금의 영웅 의적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 들어 언젠가부터 의적 이야기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법치주의 사회가 뿌리내리면서 비록 훔친 물건을 좋은 일에 쓴다 할지라도 훔치는 행위 자체가 엄연한 범죄행위에 해당하므로 그는 더 이상 의적이 아닌 한 사람의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변화의 흐름을 알지 못한 채 의적임을 자처한 생뚱맞은 범죄자들이 간혹 있었으니, 연쇄살인마 유영철과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 등이 그들이다. 20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간 전형적인 연쇄살인마인 유영철은 검거 당시 “나는 부유층 노인들만 죽인 의적”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는가 하면, 연쇄탈옥수 신창원은 신출귀몰한 탈주와 강도행각으로 인해 일지매에 빗대 의적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불우한 환경이 키운 반항심과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냉혹한 범죄자일 뿐이다.

현대사회의 의적을 거론할 때 빠지면 섭섭할 인물이 있다. ‘대도’ 조세형이다. 주로 1970~80년대 활동한 그는 16살 때부터 도둑질을 시작해 1982년 검거 될 때까지 11차례나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국회의원, 부유층 등 유명인사 집만 골라 털었는데, 그가 대도라 불린 이유는 ‘가난한 사람의 돈은 훔치지 않는다’거나 ‘훔친 돈의 30~40%는 헐벗은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와 같은 자신만의 절도원칙을 지닌 도둑으로 세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15년 형을 받은 조세형은 수감기간 중 종교에 귀의했으며, 출소 후에는 경비업체 고문과 대학 경찰행정학과 초빙강사로 활동했다. 또한 헌신적으로 옥중 뒷바라지를 한 여성과 결혼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는 등 과거 행적이 과연 의적으로서의 행위였음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는 환상에 불과했다. 도둑행각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주택 3곳을 털다 잡힌 것을 시작으로 2000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감옥을 들락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81세가 된 올해 6월에는 다세대 주택 1층 방범창을 뚫고 침입해 저금통을 훔치다 덜미가 잡혔다. 비록 돈을 훔쳐 나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폐쇄회로 CCTV 눈까지는 피할 수는 없었다. 훔친 저금통에 든 돈은 고작 몇 만 원이었다. 다세대주택에 사는 아이의 코묻은 돈임에 틀림없다. 의적의 도둑질 치고는 참으로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절도로 재판에 넘겨진 조 씨는 1심에 이어 최근 열린 항소심에서도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다시 철창으로 향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군에 입대하는 아들을 언급하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번이 ‘마지막 범죄’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80대 중반 나이의 ‘의적’의 말로(末路)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조씨와 같은 의적이 활동할 땅은 지금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떠한 이유로든 남의 돈과 물건을 훔치면 절도죄에 해당하며, 설령 가난한 사람들에게 훔친 것을 나누어준다 할지라도 장물(贓物)을 임의로 처분한 장물취득죄에 걸려 가중처벌만 받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도 조세형의 구속은 우리시대 의적 신화의 종말을 고하는 조종(弔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적은 사라졌지만 아직 이 땅 온갖 구석구석에 ‘대도(큰 도둑)’들이 바글거리니 이들의 조종은 과연 언제 울릴 것인지.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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