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스포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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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스포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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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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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시나트라의 ‘That’s life’
-광대를 만나다

영화 ‘조커’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여린 보슬비는 밤을 다소곳하게 만들었다. 나는 조금 걷기로 했다. 이런 날은 고성이나 숨가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자동차 경적도 잘 들리지 않았다. 차분한 밤의 기운 속에서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영화의 절정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That’s life’가 사용돼 반갑기도 했지만 내용이 어둡고 먹먹해 화려한 쇼를 마친 스타의 뒤안길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버스정류장 앞 나무벤치는 촉촉하게 젖어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엔 하나 둘 우산이 펼쳐졌다. 버스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사람들의 보폭에 실린 리듬을 세어보았다. 횡단보도는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 같았다. 무뚝뚝하게 나타난 넥타이 사내의 구두는 4분 음표였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신은 구두는 언제나 광이 났고 세련되었으며 또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언제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했고 목소리는 당당했으며 행동은 절제되어 있었다. 값비싼 구두를 신은 그는 느긋하게 자신의 연주를 마치고 길 건너로 사라졌다. 어디선가 에나멜 재질의 매끈한 구두가 등장했다. 높은 음을 가진 음표는 종종 걸음의 스타카토로 연주했다. 뒤따른 음표들은 쉼표에게 자리를 내주기도 했고 왔던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그때였다. 음정도 박자도 무시한 불안한 발걸음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우산을 쓰지 않았다. 정처 없는 발걸음에 박자는 이미 흐트러져 버렸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나는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스크린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는 이름 모를 광대였다.



-밤의 광대

이 노래의 독특하면서도 풍성한 전주는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달콤한 기분을 선사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둣가에서 배를 붙들고 있는 팽팽한 밧줄이 내는 소리와도 닮아 있다. 어디 하나 편히 둘 데 없는 마음은 방황하듯 도시를 떠돌지만 몇 초간의 전주가 끝나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바로 그 장소는 화려한 콘서트 장이 된다. 코러스는 빈틈이 없고 강약의 세기는 턱을 움직이게 하며 가사는 놀랍게도 극단적이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That‘s life’의 가사에는 불현듯 침입하는 불길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But if there‘s nothing Shakin’ come here this July, I‘m gonna roll myself up in a *big ball and die. My, my. 하지만 만약 7월이 되도록 어떤 기회도 오지 않는다면, 내 삶을 놓아버려도 좋을 거야.

가사 속 *big ball은 마치 ‘시지프스의 돌’ 같은 표현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들의 형벌에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리고 있는 신화 속 시지프스가 아닌 정상을 향해 돌진하다 힘이 빠져 큰 돌에 무참히 짓눌리는 현실 속 광대가 마치 우리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롤러코스터 같은 화려한 생을 살다간 프랭크 시나트라와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어둠 속 조커의 운명과 이 노래의 가사가 한 데 어우러져 밤의 공기는 순식간에 묘하게 바뀌었다.



-그게 인생이야

이런 날에는 조커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밤의 광대는 어떤 표정 하나를 찾고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시나트라 씨 같았고, 보다 가까이 다가보니 다름 아닌 나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입을 벌리며 혀를 내밀었고, 흰자가 드러나게 눈을 치켜뜨기도 했다. 이마는 부채처럼 주름지다가 한순간 펼쳐졌고 턱살은 밀가루 반죽처럼 뭉쳐졌다, 펴졌다, 미장을 마친 시멘트처럼 매끈해졌다. 찰흙을 반죽하여 모형을 만들어 내는 작업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은 우스꽝스럽다가도 갑자기 슬퍼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표정이며 유일한 그만의 표정이 완성되고 있었다. 조명 하나가 그를 희미하게 비춰냈다. 흐트러진 그의 발자국은 오래도록 도로 위를 떠나지 않았다. 조명은 점차 밝아졌고 그는 흐느적거리며 자신만의 박자로 춤을 췄다. 그는 밤의 스포트라이트를 성공적으로 받아냈다. 발광하는 빛과 그가 마침내 하나로 겹쳐진 순간 그는 오른손을 높이 뻗으며 대사를 읊었지만 누구도 듣지 못했다. 그의 눈은, 입은, 미소와 반달인 눈썹은 나를 향해 이야기 하는 듯 보였다.

“이봐, 그게 인생이야.”

구두 하나가 높이 날아올랐다. 최초로 주연을 맡은 배우의 구두였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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