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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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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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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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아마도 아홉이나 열 살쯤 되었을 테다. 마을 어귀 야산 골짜기를 올라가는 언저리에 계곡물이 졸졸 흘러드는 깊은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고추잠자리도 더위에 지쳐 풀잎에서 졸고 있는 뜨거운 여름이면 개구쟁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 웅덩이에서 물장구치며 놀며 누가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지 내기도 했었다. 시커먼 웅덩이가 무섭기도 했지만 제일 신났던 놀이터였다.

어느 해, 무진 가뭄으로 논에 물 대느라 양수기로 물을 연신 퍼 올린 뒤에야 알게 되었는데, 모습을 드러낸 바닥에는 칼날 같은 바위들이 무수히 많았고 여러 마리 뱀들이 꿈틀대고 있었으며 팅팅 불어 썩어가는 짐승의 사체도 있었다. 저토록 위험하고 더러운 물에서 여태껏 놀았다는 사실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 이후부터 그곳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때는 어려서 깨닫지 못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그 기억과 결부되어 문득 깨달은 사실은 일평생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항상 삶의 구비마다 저질렀던 실수나 허물의 원인이 더 높은 곳에 도달하지 못해 빚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더 채우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무언가를 가지는 게 나를 완벽하게 해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오류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가르쳐준 깨달음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낮아지라는 것이었다. 살아온 경험과 연륜, 나름대로 정립해온 이기적인 가치관에 잠겨 있을 때는 나 자신의 깊은 내면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를 낮추고 또 낮추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 깊은 바닥엔 원망과 분노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인품은 추레했다. 내 곁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비난했지만 실은 푼더분하지 못한 내 성격이 더 큰 원인이었다. 그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세상 탓만 했지만 정작 나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도 희생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 깊은 바닥에는 알량한 영혼과, 오만한 독선과, 삐뚤어진 관념이 가라앉아 썩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마음속에 고여 있는 오염된 웅덩이를 퍼내며 내면을 개보수하고 있다.


인적 없는 해변에 쌀뜨물 같은 뿌연 여명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지금은 우우양량하지만 경자년 첫날 새벽이 오면 저 백사장은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새해 발복을 기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지만 새해 아침을 맞아 소원을 빌기 전에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자식에게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담아 주지 않듯, 신은 담을 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을 부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교훈이 반드시 미래에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으며, 세월의 흐름만큼 그에 비례하여 인성과 인격의 깊이가 저절로 성숙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찰과 반성으로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부족하다 여기며 겸양한 삶을 견지하는 사람에게만 지혜의 문이 열려 정서와 인품이 발달하고 인격이 성장한다.

어둠이 빛을 드러내듯 마음을 낮추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그때야말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되고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있다. 맹수도 더 멀리 뛰어오르기 위해 납작 엎드리고, 육상경기에서 높이 뛰기나 달리기 선수들이 출발지점에 몸을 한껏 낮춘다. 더 멀리,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다. 우리 또한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면 부족하거나 삐죽한 결점이 드러난다. 몸에 좋은 백 가지를 찾아 먹는 것보다 해로운 한 가지를 먼저 끊는 게 더 나은 것처럼, 열 가지 거창한 계획보다 자신의 부족한 점 한가지라도 고쳐나가는 게 새로운 한 해의 진정한 도약이 되지 않을까!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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