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경영자 청지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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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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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청운동 고택이나 서산농장 기념관을 가보면 고인이 하루하루 생활했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제일 큰 기업을 일구고 그 경영자, 대주주였던 아산은 당연히 재산도 어머어마했을 것이다. 신문 지상에 한국 1위 부자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검소와 소박 그 자체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 거처나 유품에서 쉽게 보인다. 아산은 자신이 부자가 아니라 현대가 부자라는 말도 종종 했다.

“나의 생활은 중산층과 비슷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 직원들과 엇비슷하다는 뜻이다… 지금은 다이너스티를 타고 있는데, 평생 일도 꽤 많이 했고 나이도 있으니 탈 만하다 생각하면서도, 어떤 때는 너무 좋은 차를 타는 것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소 면구스럽다.”(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361)

세계 최고 부자들 중 한 사람인 워런 버핏이 나름 소박한 집에서 살고 집에 대문도 없어서 도둑이 들기도 했다는 일화와 오버랩된다. 버핏은 아직도 1958년에 3만1500 달러를 주고 산 오마하의 방 5개 짜리 집에 산다. 버핏은 자기 재산에 자기 나이면 온갖 좋은 곳을 다니면서 재미있는 것들을 즐길 수 있지만 자신은 책상에 앉아서 회사 일을 할 때가 가장 즐겁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올해 주주총회에도 88세의 나이로 나와 7시간 동안이나 주주들의 질문에 답할 정도로 일을 좋아한다.

아산은 ‘내 재산’이라는 생각은 첫 사업이었던 쌀가게를 할 때까지만 들었다고 한다. 일을 키우면서, 회사가 성장하면서 일이 좋아서 끝없이 일을 만들었지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363). 돈이 목적이었으면 어느 정도 재산이 되었을 때부터 편하게 사채업이나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기업은 규모가 작을 때는 개인의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종업원 공동의 것이요,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의 경우, 옛날 쌀가게를 했을 무렵까지는 그것이 나 개인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기업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 경영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기업을 수탁해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인 것이다.”(371)

여기서 ‘국가와 사회’ 대신에 ‘주주와 사회’를 넣으면 바로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기업관이 된다. 아산이 말한 청지기는 영어의 스튜어드(steward)에 해당된다. 이 개념은 1776년에 나왔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도 등장한다. 물론 애덤 스미스는 관리자가 자기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나태해지는 문제, 즉 주의의무 위반을 지적했지만 거꾸로 보면 회사의 재산을 자기 재산처럼 아는 문제, 즉, 충실의무 위반이 더 심각한 것이다.

누구나 보람있고 즐거운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 회사 경영자 자리에 있으면 무엇보다 하루하루 할 일이 생긴다. 특히 회사 일이 잘될 때는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을 정도다. 창업자 못지않게 일에 몰입하는 신세대 경영자들도 많다. 돈 많은 부자지만 할 일이 없는 것은 피폐한 인생이다. 특히 재벌 3, 4세들은 전문직이 아닌 다음에야 남의 회사에 갈 수도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리고 오너 경영자는 상사가 없는 회사원이다. 보기에 따라 황제보다 더 좋은 지위다. 자신을 돕는 것이 직업이고 생계유지 수단인 사람들이 생긴다. 이들 중 재능있고 품성이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회사 안과 밖에서 모두가 자신을 정중히 대하고 회사 일에 속하는 범위에서 지출할 권한이 생기는데 사실 그 효용은 개인적인 경우와 중복되는 것이 많다. 또, 경영자 자리에서는 보수로 인한 안정된 현금흐름도 발생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회사 일에 부수적인 것이고 수단일 뿐이다. 일의 개인적인 보람과 의전과 소득은 경영권의 부차적인 측면이다. 경영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경영판단에 따라 회사의 현금흐름과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다. 즉, 회사와 주주의 이익,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위해 사업상의 결정과 투자 결정을 내리고 그에 필요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직하고 열심히, 그리고 공정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고 동시에 의무다.

아산은 자신을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평생 생각했다(312). 그리고 성실한 노동자였다고 자평한다(431). 아산의 경영자 청지기론과 기업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생각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타당하다. 오히려 새삼스럽게 조명될 필요까지 있어 보인다.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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