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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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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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멜다우의'Blues And Ballads’들으며
-어느 밤의 배경 음악

2020년으로 다가서기 며칠 전, 미필담 구성원은 한자리에 모여 스승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하지 않은 자리였으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시간이었기에 보다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스승의 첫 소설집(‘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세계사, 1992)의 표지를 재현한 케이크를 마련했고, ‘소설가의 밤과 낮, 함정임 and 30th’이라는 주제로 낭독회를 열기로 했다. 나는 그간 함께 소설을 쓴 제자들이 보낸 영상 편지를 편집해둔 상태였다.

십분 여 되는 길이의 영상을 편집하며 무엇보다 고민이 된 것은 배경 음악이었다. 나는 스승을 통해 커티스 퓰러 퀸텟의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을 알게 되었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명반 ‘Kind of blue’와 에릭 클랩튼의 악보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반면에 나는 팻 매스니와 찰리 헤이든의 ‘Beyond the Missouri sky’와 영화 ‘Once’의 ost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에디뜨 피아프와 핑크 플로이드를 즐겨 듣는다는 사실 역시 결정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결국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를 선택한 까닭을 돌이켜 보자면, 다름 아닌 브래드 멜다우이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브래드 멜다우가 2019년 5월에 발매한 앨범의 제목이 ‘Finding Gabriel’인 탓이 컸다. 이 천재 피아니트스의 작곡 의도와는 별개로 함정임 소설가의 아들 태형 군의 프랑스식 이름이 Gabriel이라는 점이 내게 특별하게 가닿았기 때문이었다. 조향사 태형 군이 17세가 되던 십년 전 겨울, 나는 석사과정을 막 마친 문청이었고, 우리는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암스테르담에서 아를과 아비뇽으로 그리고 깐느와 페르피냥을 거쳐 파리로 가는 긴 여정을 함께 보낸 추억이 있었다. 그 여행 속에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 그러니까 바로 오늘과도 같은 날의 감수성이 녹아있었다는 것을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깨우치게 된 것이었다.

-종소리가 울리면

그날 아침 나는 책장 한 칸을 채우고 있는 스승의 책을 한권씩 꺼내어 살폈다. 그 책들은 책상 옆에서 늘 나를 바라보는, 혹은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높이에 있었다. 여러 번 탐독한 책도 있었고, 아직 마지막 장을 읽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막 소설가로 데뷔한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하루를 쓰는 삶으로 묵묵히 버텨낸 사람들이 경이로운 데에는 이러한 결과물이 주는 풍요로움보다도 그들이 버리고 놓길 반복한 그 시간에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스승이 그간 포기했을 많은 것들을, 그 과정 속에서 벼리어 써낸 활자들을 탑처럼 쌓아올렸다. 오직 한 사람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축적이었다.

한 데 모인 제자들은 들뜬 마음으로 연말의 인사를 나눴고, 스승이 나타날 시간이 되어서는 발걸음 소리마다 귀를 쫑긋 세우며 숨을 죽였다. 문이 열릴 때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던 방이었고, 곧 들려올 그 소리가 이 밤의 풍경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지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Gabriel이 먼저,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나타났다.

-사랑을 위한 감수성

존 브라이언이 작업한 ‘시네도키, 뉴욕’(찰리 카우프먼, 2007)의 엔딩곡 ‘Little person’은 마치 제목(Synecdoche, 제유)처럼 이 영화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I‘m just a little person(나는 그저 작은 사람이에요)”이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디에나 스토리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교나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그저 담담하게 음정을 읊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 사이사이를 채우는 피아노 선율은 여린 바람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흐르고 있고,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다.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가 ‘Blues and Ballads’에서 이 곡을 선정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콜 포터와 찰리 파커, 레논과 메카트니, 그리고 존 브라이언의 곡들을 재해석하여 놓아둔 것은, 사랑을 위한 감수성이 닮았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맥락으로 나 역시도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의 1998년 앨범 ‘Art of The Trio, Vol.3 : Songs’의 첫 번째 트랙 ‘Song-Song’을 긴 영상 편지 위에 놓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며칠 동안 고르고 고른 문장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누군가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를, 누군가는 ‘광장으로 가는 길’을, 누군가는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을 읽었다. 누군가는 책 뒤의 작가의 말을 대신 읽었고, 누군가는 에세이의 한 구절을, 나는 ‘백야’의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스승은 자신이 오래전에 쓴 문장을 제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는 브래드 멜다우의 섬세한 피아노 선율을, 영상을 통한 서로의 안부를 함께 나눴다. 3시간의 낭독으로 30여년을 제유했으며, 희미한 조명으로 긴 여정을 축복했다. 우리는 몇 병의 와인을, 빵과 치즈를, 그리고 소설을 함께 음미했다. 우리가 스승을 위해 준비한 짧은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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