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게 자란 무남독녀의 호된 시집살이
  • 경북도민일보
귀하게 자란 무남독녀의 호된 시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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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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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농촌서 자랐지만
밭일도 한번 안했던 ‘공주’
결혼 후 생활비 벌기위해
반장 등 닥치는 대로 일해
50년간 고생하며 살아온
내게 “대단타” 위로 하고파
임귀분 씨 가족들이 딸 졸업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귀분 씨 집 문패
임귀분 씨 현재 모습.
임귀분 씨 30대 모습.

 

 

임귀분의 포항이야기<15>

‘용흥동 21통 4반 반장집 임귀분’

“이 파란색 문패가 붙은 집에서 50년 동안 살고 있심더. 신광서 시집와가 단 한 번도 이사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예. 시내가기 편하고 산 가깝고, 내사 아파트가 아니라도 여(집) 만큼 좋은데는 없는 거 같아 아직 살고 있답니다.”

신광면 상읍1리에서 귀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집은 신광장터 바로 옆이다. 딸 하나 밖에 없다보니 농촌이지만 정말 ‘공주대접’ 받아가며 자랐다. 부모님들은 모내기며 타작 때도 아예 논과 밭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한마디로 참 ‘포시랍게’ 컸다.

아버지는 타작(추수) 할 때면 논 근처에 오면 까끄레기 옷에 묻는다고 아예 대문을 잠가 놓을 정도로 예지중지 키웠다.

그때만 해도 같은 마을 또래 친구들은 소치는 것은 물론 논과 밭에서 집안 일을 돕느라 낮에는 코배기도 볼 수 없고 밤이 돼서야 친구들과 모여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형제자매도 없이 외롭게 자라다보니 친구들과 떨어져 지낸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신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집안 형편이 충분히 되지만 친구들이 중학교 진학은 안하는 경우가 많아 나 역시 중학교 가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귀염 받고 자라다 보니 부모님을 떠나 객지로 나간다는 것 상상도 못했다. 내 나이 17살 때인가. 사촌언니를 따라 대구에 미용기술을 배우러 간 적이 있는데 엄마가 보고 싶어 결국 일주일만에 집에 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거 치고는 결혼은 일찍 한 편이다. 22살 때 1년 연예 끝에 건설업을 하던 총각 공복득(당시 30살)과 결혼해 이 곳 용흥동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귀하게 자라다보니 정말 밥도 한번 안해 보고 시집왔다. 포시랍게 자라다보니 4남매 중 장남에다 시할머니까지 계시는 시집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내가 외롭게 자라다보니 3남1녀의 자식 넷을 낳았는데 아이들이 다 예의 바르게 잘 자라준 건 큰 복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심한 치매로 수년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을 맏며느리인 내가 했다.

그러다가 엄청난 불행이 닥쳐왔다. 건축일을 하던 남편이 15년전, 60대 초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가 84살로 돌아가시고 3개월 만에 먼 길 갔는데 남편은 의식이 없어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도 모른 채 투병하다 세상을 등졌다.

어릴 적 고생 없이 자랐지만 시집와서는 그 고생이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남편이 떠나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기술이 없어 돈벌기는 어려웠다. 아파트 계단청소도 하고 노인일자리도 닥치는 대로 하고 반장일도 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내 스스로 생각해도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라 당장 내일 아침거리 없어도 끙끙 앓지 않았다. 힘들어도 내색을 안했다.

그렇게 잘 견뎌내고 기다리니 아들딸 시집 장가 다보내고 이제 손자, 손녀 재롱 보는 재미로 산다. 요즘에는 그나마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행복하다. 옛 고향 친구 8명이랑 한조가 돼 한 달에 한 두 번씩 모여서 점심도 먹고 수다도 떨고 하는 게 낙이다.

그래도 70평생을 뒤돌아보면 세월이 어찌 이리 빨리 갔는가 싶다. 시집살이 한 집에서 50년을 살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대단타”라고 위안하고 싶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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