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시련 날 따라다녀도 인생 한 페이지를 넘긴다”
  • 경북도민일보
“고난·시련 날 따라다녀도 인생 한 페이지를 넘긴다”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20.0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려웠던 때 고등학교 가고파
아버지 돈 훔쳐 부산으로 도망
독학한 영어로 미군부대 취업
미군부대 철수·장례만 세번
그토록 힘들었던 1990년도
그래도 자식들 키워가며 버텨
정복암 씨 군 시절.
정복암 씨 부부 결혼식 모습.
정복암 씨 월남전 참전 모습.
정복암 씨 현재 모습.
정복암 씨 현재 모습.

정복암의 포항이야기<16>

참 기구한 운명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나 만큼 기구한 삶을 살아 온 사람은 드물 것이다. 시련이 지나가면, 고통이 오고 고통을 이겨내면 슬픔이 찾아오고….

청하면 덕성1리 63번지가 내 고향이다. 이곳에서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님 두 분은 모두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치감치 중학교를 졸업하고 객지로 나갔다. 당연히 나도 청하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가정이 어려워 고등학교는 못보내준다는 아버지 말씀을 듣고 부산으로 도망쳤다. 내가 돈벌어 야간고등학교를 가더라도 대도시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17살 때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 5000원(지금 5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그러나 낯선 객지 생활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넝마주이도 하고 찹쌀떡도 팔아가며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돈벌러 강원도 태백 황지로 올라가 광산에 광부일을 하려고 했지만 그 마저도 나이가 어려 못하고 탄광근처 음식점에서 숯불피우는 일을 잠시하다가 입이 돌아가는 와사풍이 와서 다시 청하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건강이 좀 회복되자마자 공수부대 하사관 1기생으로 지원, 입대했다.

훈련강도가 엄청나게 강한데다 당초 약속과 달리 군에서는 장기복무를 권했다. 군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장기 복무지원을 권하는 장교와 갈등을 빚다가 작은 사고를 치게 됐고 결국 끌려가다시피 해서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월남전에 파병됐다.

1972년초에 월남으로 가는 배안에서 설날과 내 생일(음력 1월 29일)을 보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선에서 1973년 2월의 생일을 보냈다.

월남에서는 대한민국 파병국군이 가장 많이 전사했던 악명높은 앙케전투에 참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41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4년 다시 고향 청하로 돌아왔지만 농사일 말고는 마땅하게 할 일이 없었다.

다시 돈을 벌기위해 부산 부둣가로 갔다. 무역선을 타기 위해서는 우선 원양어선 경력이 있는 선원수첩이 필요해 먼저 3년간은 라스팔마스에서 고기잡이를 했다. 다시 경력을 쌓아 3등항해사로 일본선적 상선을 타고 일본을 비롯, 동남아 호주 이스라엘 등 20여개국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선박행정일을 하면서도 영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독한 마음으로 독학과 외국인 선원들의 도움으로 영어통역 실력을 어느 정도 갖췄다. 그 영어공부가 나중에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배를 타고 고생하면서 돈을 조금 모은 후 더 큰 돈을 벌겠다고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9인승 베스타를 사서 학원통근업을 했는데 역시 체질이 아닌지 몇 년을 못 버티고 망해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향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청하에 미공군의 공병부대(OL-LA)가 생긴 것을 알았고 그곳에서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을 구하는 것도 알게 돼 직접 찾아가서 취직하는데 성공했다. 보수도 좋았고 파트타임이 아닌 퍼머먼트 고용계약을 위해 수원 비행장근무를 자청했다.

정식 군무원 시험을 치고 7개월가량 수원에서 머물던 중 하숙집 할머니의 중매로 아내를 만나 4살 때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집에서는 궁합이 좋지않다고 극구 반대를 했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6년후 그 우려했던 걱정이 아내의 죽음으로 현실이 되고나니 미칠 정도로 괴로웠다. 아내는 미군부대에 근무할 때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했는데 잠시 쉬고 있을 때 아내가 그 오토바이를 타고 7번국도에 나갔다가 졸음운전 하는 트럭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그렇게 허망하게 아내가 떠나가고 나니 내 운명이 왜 이다지도 처참한지 한탄스러웠다. 1990년은 그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장인도 4월에 돌아가셨고 또 7월에 마누라까지 죽고 말았다. 게다가 그해 10월에는 나의 밥줄이던 미군부대마저 본국으로 철수하고 문을 닫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시련이 잇따랐지만 나만 쳐다보고 있는 남매가 있어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농촌에서 마땅히 할 게 없어 주변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 벼를 논에 심어주는 ‘수도작(手稻作)대행’이었다. 내 땅은 1평도 없었지만 1993년부터 26년째 많을 땐 150마지기의 논을 수도작을 하며 남매를 키워 시집장가 다 보냈다.

지금은 몸이 늙고 혼자 사는데다 2년전부터 전립선암을 앓고 있어 힘이 들지만 주말이면 포항시내에 사는 아들과 손자들이 찾아와 할애비를 위로해주고 간다. 그런데 포항 사는 아들이나 부산으로 시집간 딸내미는 집에 올때마다 오토바이를 직접 몰고 올 때가 많아 걱정스럽다. 제 엄마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그렇게 죽었는데 피는 못 속이는지 그 피가 흐르는 자식들마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그리 많지 않다해도 또 들판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오늘도 농기구를 손질하며 파란만장했던 내 인생에 또 한 페이지를 넘긴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