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사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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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사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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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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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운동장에 하얀 눈이 소리 없이 소복소복 쌓여 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눈이 녹으면 뭐가 될까”라고 묻자, 모든 학생은 “물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오직 한 학생만 대답이 달랐다. 소년가장으로 매우 가난했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친구들에게도 다정했으며 성적도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의 대답은 이랬다. “봄이 되어요”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은 채 별빛처럼 초롱초롱한 그 학생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불우한 가정환경이었지만 풍부한 정서를 가진 그 학생의 작은 가슴속에는 봄의 새싹 같은 희망도 함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발발한 걸프전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끈 노먼 사령관이 방송에 출연해 대담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진행자가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명명된 이번 전쟁을 지휘한 장군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그는 “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을 해 방청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이어진 다음 질문에서 진행자가 “현재 미국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미국에 적대적인 외부의 국가들이 아니다. 미국 남자들에게 눈물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미국의 가장 큰 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냉철한 사고와 판단력을 가진 군인이었지만 피폐해져 가는 인간성이야말로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것이다.

물기 없이는 메마른 사막이 푸른 숲이 될 수 없고 방바닥을 적신 부모의 눈물 없이는 자식을 바르게 키워내기 어렵듯, 감성과 정서가 메마른 가슴에는 꿈이 자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미건조한 나날만 반복된다. 또한 감성이 없는 삭막한 사회는 서로 호혜적이고 조화로운 공존 대신 흑백논리의 횡행으로 분열과 대립과 충돌이 난무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미소보다는 냉소가, 칭찬보다는 비난이, 격려보다는 질책들로 흥덩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그리고 울지도 않는다.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으며 어지간한 일에는 감동하지도 않는다. 나서지도 않고 간섭받기도 싫어한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저마다 낱알처럼 개체로 유리되어 버렸다.

바스러질 듯 마른 낙엽 같은 가슴으로 살아가는 각박한 세태에서 진정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회복해야 할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다. 물론 고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여유가 없는 바쁜 생활 탓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과의 관계가 너무 건조해졌다는 데 있다. 급속한 IT의 발전으로 청소년들의 놀이터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게 일상적인 놀이가 되었고 부부간에도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보다가 잠이 든다. 생활은 스마트해지고 편리해졌지만 사고는 점점 기계화되어 정서와 감성이 고사하고 있다. 사람의 존재가치 충족은 주변의 관계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서 비롯된다. 아무리 SNS를 들여다보아도 일순간의 지루함만 달래줄 뿐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지 못한다. 결국 너와 나, 사람과 사람의 좋은 관계만이 입술에 노래를 잃고 웃음이 사라진 우리들의 공허한 표정을 환하게 바꿀 수 없다. ‘인간관계 회복’ 이것은 부나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허투루 여겨도 될 그런 대상이 아니다. 삶의 질을 가름하는 행복의 주안점이자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무릎이 꺾이는 찬란한 아름다움도 홀로이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환호하며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영광이 무슨 소용 있으랴. 온 세상을 가졌다 해도 홀로이면 쓸데가 어딨으랴. 어떤 희열도 스스로 발현되지 않는다. 모두 주변 사람들로부터 내게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최상의 의무는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냉랭하고 냉소적인 세상이 되어 정열의 불꽃에 찬물을 붓고 희망을 우롱하며 절망시키고 꿈을 비웃어 좌절시키지만 그래도 우리가 일관되게 지향해야 할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가는 일이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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