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도시, 우리의 미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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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도시, 우리의 미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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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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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일의 도시공감

얼마 전 통일부 사이트에 올린 홍익대 모 교수의 글이 화제가 되었다. 사회주의 도시계획, 특히 평양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제목의 글이었다. 이미 삭제된 글이라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동네에서 만든 고추장, 운동화를 사용하는 소규모 생산구조가 우리 미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은가’라는 부분은 아직도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다. 북한식의 소규모 지역생산체계를 예찬하는 내용이다. 남북 간 간극을 좁혀보자 하는 정도의 취지로 쓰인 글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글의 기저에는 뿌리 깊은 ‘반도시주의(Anti-Urbanism)’ 관점이 깔려 있음을 본다. 반도시주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도시, 특히 규모와 집중을 전제로 하는 대도시를 거부하는 관점이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소도시 중심체계, 자족적 지역산업과 같은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표현 자체는 낯설지 몰라도 반도시주의는 인류 지성사에 있어 오래된 흐름이다. 근대 시기 지식인들 중 상당수가 이런 입장을 취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거두는 루소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격언은 자연보호에 대한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사실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감을 담은 표현이다. 반도시주의를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가져간 것은 마르크스를 필두로 한 사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현대 도시를 사회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장치라고 보아 대적하고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심지어는 근대 도시계획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은연중 반도시주의적 철학을 나타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에베네저 하워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아예 도시성을 배제한 작고 농촌적인 도시계획을 제안한다. 도시를 해체하기 위한 대안적 도시모형을 제시한 것이다. 반도시주의는 이처럼 근대기 지식인들의 사상 근간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아 왔다.

시대의 상황을 보자면 반도시주의 경향이 나오게 된 것도 이해할만 하다. 18세기 런던에서 시작된 산업화는 유례없는 급속한 도시화를 유발한다. 도시계획을 위한 제도와 기법, 경험 모두가 일천하던 시절에 갑자기 형성된 고밀의 대도시는 그야말로 손대기 어려운 혼란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는 비좁고 불결하고 비정한 곳이 되어갔고, 거기에는 어떤 희망도 없어 보였다. 이때 형성되기 시작한 지식인 계층이 도시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당시의 많은 문학, 철학 작품 속에서 도시는 주로 인간소외를 유발하는 비정하고 불평등한 곳으로 묘사되곤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도시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질문은 했지만, 굳이 답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현실이 결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하버드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최근 ‘도시의 승리’라는 저서를 통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지식인의 역사에 있어 드물게 대놓고 ‘도시주의’를 표방하는 학자이다. 그는 반도시주의는 과거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해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관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반도시주의에서 제기하는 도시문제들, 즉 인간소외, 건강악화, 범죄증가와 같은 문제들 또한 과거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 도시를 이루는 도시성이야 말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점을 현실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도시의 승리를 선언해도 될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의 대도시들이 보여주는 창조와 혁신의 역량이다. 도시는 더 이상 반도시주의자들이 생각처럼 어둠과 죽음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고층고밀의 대도시일수록 국가나 기업보다도 중요한 창조력의 단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대도시는 창조계층을 모으고 그들 간의 소통을 유발하며, 끊임없는 혁신의 빛을 발하는 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창조도시’를 구현해 가는가에 있지, 결코 과거로의 회귀에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지금 맞닥뜨린 도시재생의 문제는 보다 고도화되고 집약된 도시, 콤팩트한 도시로 전진해가라는 신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평양과 같은 자족적 도시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자유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보도록 하자. 서울은 얼마든지 평양이 되어볼 수 있다. 자족적 지역산업, 생산-소비 협동조합 등, 필요하다면 시도해보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평양은 과연 서울처럼 되어볼 수 있을까? 단순한 형태가 아닌, 그 속에 깃들인 것들 말이다. 다양성, 활력, 만남, 소통, 교류 등등.

결국, 우리 도시의 미래를 찾기 위해 굳이 평양을 컨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재료들은 이미 우리 도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 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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