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필름 되감다보니 어느새 제2막 찍고 있니더~
  • 경북도민일보
인생 필름 되감다보니 어느새 제2막 찍고 있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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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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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큰집 ‘청춘사진관’서
기술 배워 작가로 활동
50세 다리수술 후 새인생
사진·비디오 촬영으로
추억 찍으며 보람 느껴
청년회 등 단체 활동도
자식들에 “항상 선하게
남에 해끼치지 말라” 당부
류시하 씨 현재 모습.
류시하 씨 청년 시절.
류시하 씨 가족들의 과거 모습.
류시하 씨 청년 시절 친구들과.

류시하의 포항이야기<19>

기계에서 태어나 안태 곧 성계1리가 고향이다.

안인곡 큰 고인돌 7기가 있어 칠성리라고도 부르고, 어진 선비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동네라고 해 안인곡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젊었을 때, 대구에서 좀 살았다. 19살인가 20살 때 즈음에 문화초자 유리공장에서 일했다. 병 만드는 공장에서 2년 정도 일했는데 재미도 없고 장래도 없어 그만 두었다. 그러다가 23살에 결혼했는데,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집사람을 기계 지가리에서 선을 보았고, 처가 집 친척들을 만나게 됐다. 형님이 서둘러서 그렇게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의 아내 조귀화 여사(68)를 그렇게 만났다.

첫 대면할 때 인상이 너무 좋았다. 어른들이 계획적으로 자리를 만들었는데, 전혀 눈치를 못 차렸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리 저리 어울려 놀러 다니다가 초청을 받아 선을 보았다. 안강 문화의 전당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기계의 청춘사진관에서 18세에 사진기술을 배웠다. 놀러 다니다가 큰 집이 기계에서 부자로 잘 살았는데, 그 당시 사진관에서 숙식하며 기술을 배우게 돼 초대작가로 활동했다. 선배 작가들과 학 사진들을 찍을 때는 많이도 다녔다. 그러다가 달성 네거리에서 새마을 사진관을 시작했다. 사진, 대서, 도장도 새기고, 뭐 그렇게 시작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래서 글도 대서도 하고, 도장 파는 데 도움이 됐다. 회갑, 돌잔치, 결혼식 등 출장 사진도 많이 나갔다. 당시 동네 사진 붐으로 인해 우리 동네에 사진관이 여섯 개나 있었다. 사진관이 잘 되어서 농협 2층에 예식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자전거 타고 상옥, 하옥, 죽장으로 출장을 다녔는데, 자건거가 펑크 나면 끌고 와야 하고 캄캄한 밤에 혼자서 다니다 보니, 참 고생을 많이도 했다. 서울 삼성병원에서 나이 50에 불편한 다리를 수술하고 나서 날아갈 듯 좋았다.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내 집을 샀다. 1층 사진관하고, 2층 당구장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비디오 촬영으로 분주했고, 그 결과 수입도 좋았다. 노후 대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사업이 실패해 많이 날리기도 했다.

사회활동도 많이 했다. 자유총연맹 청년회 총무를 했고 2000년대부터 4~5년 간 위원장도 역임했다. 위원장협의회 회장을 4년간 하기도 했다. 각 단체, 청년회, 체육회 감사도 하고 총무도 했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것은 황금색 보리밭 사진을 찍을 때다. 그 시절엔 카메라가 귀한 시기였다. 사진관에 의뢰해서 행사 사진을 찍었는데, 주로 식당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고 야외 사진은 주로 지가 등대사, 성계 은각사, 노당 화룡사 등 절에서 많이 찍었다. 밑천 안들이고 많이 남는 장사였다.

가족으로는 맏이가 회사 다니다가 특수고물 고철업을 하다 필리핀으로 나갔고 막내는 우리 동네 문화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자식들에겐 “저거 알아서 살도록, 생각대로 사는 것이 좋다”, “남에게 해 끼치지 말고 선하게 살아라”라고 당부하고 싶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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