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사회적 자본, 그리고 대구경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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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사회적 자본, 그리고 대구경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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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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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일의 도·시·공·감
재난을 맞은 도시의 모습을 우리는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다. 2년 반 전 지진은 두 번의 큰 흔들림으로 찾아 왔고, 이후에도 잦은 진동을 유발하면서 지역민들을 오랫동안 잠 못 들게 한 바 있다. 우리가 늘 밟고 사는 땅, 그 든든한 땅도 흔들릴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에 새삼 많은 지역민들이 놀랐었고, 그 뒤에도 정신적 어려움을 겪기까지 한 분들이 많았다.

다행히 지진의 불행은 잘 극복되어 갔다. 아직도 손상된 집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한 안타까운 분들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전보다도 나아진 측면도 있다. 내가 재직하는 학교만 해도 그랬다. 외벽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 방송을 탔을 만큼 당시 피해가 큰 곳이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도움의 손길로 놀랍게 회복될 수 있었다. 원상 복구는 물론, 고급철강을 지원받아 더 튼튼하게 업그레이드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지역민들의 노력과 협동이 이어지면서 피해 복구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잠시 주저앉았었지만, 이내 일어나 다들 힘을 내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빠른 재건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의 진정한 수확은 따로 있었다. 서로를 걱정하고 도와주는 과정 속에서, 지역민들이 전에 없던 신뢰와 협동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인프라’는 다소 손상되었지만, 이를 재건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자본’을 쌓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도시는 도로, 건물 같은 ‘물리적 인프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사회적 자본’이다. 사회적 자본이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인프라’이다. 지역민들 간의 공감대, 상호 신뢰, 협조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사회적 자본이야 말로 지속적 경제발전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현란하게 인프라를 쌓아 올린 도시라 해도, 사회적 자본이 천박한 수준이라면 결국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진이 지역의 인프라를 허물었어도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지역이 가진 사회적 자본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번의 재난은 지역을 또 다른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진이 건물을 흔들었다면, 이번 역병은 건물은 그대로 둔 채 사람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들리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축소되어 가고 있다. 약속은 사라지고, 모임과 회의도 없어졌다. 만남과 접촉이란 단어는 어느새 꺼림칙한 의미가 되어 버렸다. 불과 한 달 만에, 아예 딴 세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이대로 오랫동안 방치된다면, 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역병이 무서운 것은 단지 사람을 해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사람간의 관계를 파괴해가고, 결국은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고갈시켜 버린다. 까뮈가 페스트라는 소설을 통해 그런 장면들을 일찍이 묘사해놓지 않았는가. 상상할수록 커가는 걱정에 지역민들로서는 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나날들이다.

하지만 지난주에 보도되기 시작한 대구경북인들의 모습이 슬픔 속에서도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주고 있다. 지역민 스스로 이용을 멈추어버린 터미널의 모습이, 외지에 있는 자식에게 ‘얼씬도 마래이, 나도 안간데이’라며 매정할 정도로 만류하는 모심이, 그리고 추운 새벽 기약 없는 마스크 줄을 서면서도 불평 없이 그저 묵묵히 버티는 모습이 말이다.

‘지역 봉쇄’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나오면서 다소 분노는 했지만, 워낙 유명한 지역민 자존심에 ‘자발적 봉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민폐 끼치기 싫고 신세지기도 싫다, 봉쇄를 해도 우리가 스스로 하겠다는 그런 메시지였다. 고통 속에서도 가족에게 앓는 모습 보이기는 싫은 아버지 마냥,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어찌나 문을 꼭 닫고 있는지, 신음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다.

봉쇄 전에 도시를 집단으로 탈출하는 난리가 벌어진 이탈리아의 상황을 오늘 접하면서, 대구경북인들의 이런 고집에 새삼 놀라게 된다. ‘명예로운 고립’이라는 말이 역사 속에 있었다지만, 지금 대구경북인이 하는 것과 같은 명예로운 고립이 정말 있었을까. 혼자 앓을지언정 함께 고생하지는 않겠다는 오롯한 고집이 역병의 시대에 지역민을 또 하나로 뭉치게 하고 있다. 뜬금없이 찾아온 수천의 확진자 명단을 보고 울부짖으며 남 탓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떠넘기는 것은 그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속으로만 신음하면서, 그렇게 고통을 다 끌어안고 참아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누가 알아주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말이다. 그렇게 대구경북인이 바이러스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회적 자본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김주일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 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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