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여성의 좌절감을 말하다
  • 이경관기자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여성의 좌절감을 말하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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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3주년 맞는 오정희 작가
현대 여성의 삶 비추는 대표작
전쟁 3부작 포함 총 11편 수록
오정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608쪽. 문학과지성사
등단 53년째를 맞은 오정희 작가의 중·단편선 ‘저녁의 게임’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데뷔작 ‘완구점 여인’(1968) 등 초기 소설과, 시대적 어둠을 통해 현대 여성의 삶을 비추는 대표 작품인 전쟁 3부작 ‘유년의 뜰’(1980), ‘중국인 거리’(1979) ‘바람의 넋’(1982)을 포함해 모두 11편을 담았다.

특히 오정희 소설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던 ‘아버지’를 좀더 선명하게 재현한 ‘저 언덕’(1989), 작가 특유의 모순적 존재론이 두드러지는 ‘얼굴’(1999), 떠돌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원천을 조망한 ‘구부러진 길 저쪽’(1995)은 ‘오정희 컬렉션’(문학과지성사, 2017)에 미수록된 작품들로, 작가와 해제자, 출판사의 면밀한 검토와 협의를 통해 새롭게 다듬어 실었다.

오정희 작가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맛깔스런 문장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 튼튼한 뿌리를 내렸다.

40년이 넘도록 작가로서, 여자로서 숱한 계절을 반복하면서도 튼튼한 작품들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새 계절을 맞이하는 큰 작가이다.

오정희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작품으로 가지각색의 삶을 작품을 통해 담아낸다.

책임 편집과 해제를 맡은 문학평론가 심진경은 오정희 소설에 대한 모호한 수식어구와 정형화된 해석에 갇힌 그간의 평가가 여성문학을 해석하는 클리셰가 됐다고 지적하며, “궁극적인 문제는 내면성의 탐구가 아니”라는 작가 본인의 말에서 출발해 당시의 사회적 문제점을 되비추는 반사경으로서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르면 오정희의 소설은 “폭력적 권위와 위선으로 몰락조차 달콤한 실패담으로, 혹은 또 다른 성공담으로 윤색”해온 남성 중심의 낡은 서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사를 발명해내려 한 결과물이다. 또한 가부장제적 억압에서 비롯된 여성의 무력감·좌절감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맥락을 되짚어가는 이야기다.

오정희 소설의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 미화되거나(‘유년의 뜰’), 생계를 위해 딸을 착취한다(‘저녁의 게임’).

그러나 가족을 방치한 채 허황한 이념만을 좇는 무력한 인물이더라도 ‘아버지’란 이름의 폭력적 권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딸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제도권 안에서의 정돈된 삶에 대한 강박적인 욕망을 갖게 된다.(‘저 언덕’)

가장 또렷하게 존재하는 것은, 누군가의 딸이며 어머니이자 아내이면서도 그에 앞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인 여성 인물들이다.

억압적 삶과 권태를 견딜 수 없어 충동적으로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는 ‘은수’(‘바람의 넋’), 통렬한 자기 인식 끝에 ‘아버지가 다르게 살았다면 나 역시 지금과는 달리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 일갈하는 ‘원단’과 끝내 제도에 저항하며 살기를 선택한 ‘미옥’(‘저 언덕’), 웃지도 않고 말도 않고 식탐만 많은, “다른 애들하고는 좀 다른” 명민한 관찰자 ‘노랑눈이’(‘유년의 뜰’), 패를 알고 하는 낡은 게임은 재미가 없다며 무능한 아버지와 가부장제에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나’(‘저녁의 게임’)가 그렇듯이, 치열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여성 인물들과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모순적 한계까지가 시대를 명료하게 비춰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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