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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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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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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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아침마당>에 출연했습니다. 6년 전에 50분 강의로 출연한 후에 두번째이지만 이번에는 라이브로 모두 진행했습니다. 라디오 인터뷰 라이브, 티비 인터뷰 라이브는 많이 해보았지만 엄청난 사람들이 아침에 보는 티비 강의 라이브는 처음이었습니다. 라이브 뉴스 볼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한달 전에 대본 때문에 KBS 신관에서 작가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대표작가를 포함해 무려 네 명이 나왔습니다. 여자 네 명이 있으니 제가 평소에 만나는 집단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일단 사람을 업(up)시킵니다. 1인 1기에 대해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해서 주절주절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 끝나고 나서 이렇게 구성하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논리적 구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였는데 논리적 구성이 아닌 스토리 전달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순간 머리를 꽝 치는게 ‘이런 게 스토리구나. 강의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였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코로나19때문에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방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7시 정도에 KBS 본관에 도착하여 분장과 머리 드라이를 했습니다. 역시 프로답게 단 몇 분 만에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바꾸어 줬고 바뀐 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평소 유튜브 등의 화면에 비친 얼굴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대기실로 옮겨 대본 연습을 하는데 대본 연습은 않고 이런저런 잡담을 했습니다. 주식시장 어떻게 되느냐, 우리 아버지가 주식 하다가 쫄딱 망해서 이번에 남편이 주식 산다길래 절대 사지 말라 했다는 등이었습니다. 대본연습은 언제 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대표작가가 들어왔습니다. 대표작가도 대본연습은 시키지도 않고 잡담 좀 하다가 몇 마디 주의사항만 알려주고 마쳤습니다. 라이브라 가끔 발표자가 당황해서 순간 앞이 하얗게 되는데(블랙아웃 되는데), 진행자와 카메라 담당자들이 다 알아서 대응하니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정도였습니다. 강사들을 어느 정도 믿고 또 문제가 생겨도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스튜디오 들어가서 진행자들과의 리허설도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제가 ‘어제 미국 시장을 봤더니 주가가 어떻고’ 얘기했더니 진행자분이 처음에 제가 어젯밤 미국 슈퍼마켓 같은 곳에 다녀왔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금융시장에서는 항상 시장이라고 표현하다 보니 생긴 갭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용어를 고쳐 달란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라이브로 방송할 때 제가 알아서 금융시장으로 고쳤습니다.

저는 방송할 때 목소리가 가끔 잠기는 게 가장 긴장됩니다. 학교 때 목감기를 오래 앓았는데 그 이후 성대가 약해진 듯 합니다. 그날 코로나19 때문에 청중이 없어서 진행자들을 보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강의 대본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리액션을 잘 하는지 감탄했습니다. 창(唱)을 할 때도 좋은 고수(鼓手)가 있어야 장단이 척척 맞고 신이 나는데 마치 뛰어난 고수처럼 장단을 기가 막히게 맞춰주었습니다. 역시 프로의 세계입니다. 카메라 뒤에는 작가들이 서서 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잘 웃는 사람이 있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웃는 표정으로 서 있으니 뭔가 제가 강의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뒤에 팔짱 끼고 서 있으면 강의하는 사람들이 주눅들 겁니다.

다른 분들도 강의를 잘 마치고 무사히 끝났습니다. 한 편의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데 많은 사람들의 세심한 손길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진행과 연락을 맡은 막내 작가는 나중에 대표작가로 성장해서 이런 과정을 총 책임지겠지요. 기쁨, 허전함, 시원함이 동시에 몰려왔습니다. 누가 주연인지 조연인지 모르겠지만 무대 뒤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자본주의 체계에서 일을 많이 하면 오히려 불평등을 조장하기에 일을 적게 하고 게을러지라고 합니다. 모두가 4시간만 일을 하면 생산할 수 있을 일을 일부가 8시간 열심히 일하니 나머지는 놀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8시간 일을 해서 돈을 번 사람은 이 돈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저축을 하니 부의 불평등이 만들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게으름의 찬양’이라는 글도 썼습니다.

이에 반해 일에 관해 극단적, 혹은 이상적 사고보다는 현실적 타협점을 찾고 있는 것이 프랑스의 알랭 드 보통이 2009년에 쓴 <일의 기쁨과 슬픔>입니다. 그는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일의 전 과정을 하나하나 추적하면서 일에 대한 자신의 단상(斷想)을 얘기해줍니다. 몰디브에서 어부를 만나서 배를 타고 인도양으로 나가 참치 잡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참치 가공 공장을 거쳐 가공된 참치가 비행기로 수송되어 영국의 창고로 52시간 만에 배달되는 것을 추적합니다.

지나치게 분업화되고, 하루의 일에 지쳐서 아무것도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고, 가끔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하노라면, 거기에다 자신의 일을 알아주지 않는데도 열심히 설득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면 일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일은 그럼에도 기쁨을 줍니다. 이번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관련된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나에게서 그 슬픔과 기쁨을 보았습니다. 이 기쁨을 알랭 드 보통은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제가 덧붙일 것이 없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입니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입니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 줄 것입니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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