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를 듣지 않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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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를 듣지 않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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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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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대화
-듣는 주체
이런 걸 자랑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청각이 예민한 편이다. 의학적인 견해를 들어 설명할 수는 없어도 내가 가진 감각 중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면에 다른 감각은 좀 떨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코는 비염으로 늘 고생하고 있고, 눈은 계속 나빠져 가고 있으며 혀는 모든 맛에 길들여져 버렸다. 하지만 귀는 무언가 다르다. 이전보다 발달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사회화가 덜 되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처럼 아직 새 것 같은 느낌. 새초롬하게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귀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하고 싶어 마련한 자리다. 귀가 이렇게나 도움을 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헤비메탈의 볼륨을 끝 간 데 없이 올리기도 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꿈속에서도 틀어놓았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쳇 베이커와 허비 행콕을 들려주고 있는데도, 두 귀는 불평불만 없이 그 모든 소리를 해석하려 하고, 이해하려 하며, 나아가 포용하고 있다. 귀는 스스로 거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쉰다는 걸 모르는 상태인지도. 귀는 나의 밥벌이이자, 재능이자, 친구. 그런 귀와 소통을 요하는 바, 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오른 쪽 귀와 왼쪽 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건너편의 왼쪽 귀보다는 고음 영역에서 예민하죠. 일단 그는 듣는 자세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는 반쯤 숙인 채로 음악을 듣곤 하죠. 그런데 몸이 오른 쪽으로 미세하게 기운 자세예요. 아무래도 제가 더 낫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사실 우린 두 개의 소리를 하나로 종합해서 전달하기 때문에 소리의 절반만 흡수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쨌거나 그가 리듬을 즐기며 고개를 서서히 흔들면 덩달아 저 역시도 그런 기분이 되곤 합니다. 저희는 가급적 객관적인 소리의 체계를 그대로를 전달하려는 편이에요. 판단을 유보하는 거죠. 나머지는 저 안에서 이뤄집니다. 깊고 어두운 동굴 같은 세계인데, 결국 소리가 도착하는 건 여기가 아니라 저 안이랍니다.”

“맞아요. 오른쪽 귀가 간만에 옳은 얘기를 했네요. 그의 자세는 소리를 듣기에 결코 좋은 자세는 아닌데,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좋아하는 소리를 향해 우리를 가까이 데려가려 하는 거예요. 결국에는 소리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하니까요. 하지만 크게 듣는다고 해서 결코 잘 들리는 게 아닙니다. 모든 소리는 어떻게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다를 수 있어요. 말하자면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물론 그런 것과 별개로 순수하게 아름다운 소리가 있잖아요. 바람 소리,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 별빛이 흐르는 소리. 무수한 소리들이 우리의 곁에 있습니다. 그런 소중한 현상에는 귀를 가까이 가져가려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아니랍니다. 그것은 늘 그곳에 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하니까요. 우리는 점점 작아져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겁니다. 소리는 우리를 지나쳐 갈 것이고, 그는 이제 무엇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귀의 대화

그는 주말이면 턴테이블 앞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비가 오는 봄이면, 쉘부르의 우산이나 에디트 피아프가 듣기에 좋았다. 손이 잘 가지 않아 묵혀두었던 판소리 명반을 올려두기도 하고, 흑맥주와 어울리는 킹 크림슨이나 조용한 제임스 테일러를 듣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늘 그래왔듯 앨범의 장르는 재즈로 옮겨갔다. 이내 스피커에서는 트럼본 소리와 낭랑한 클라리넷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리가 스민 흔적들을 발견했다. 음악을 마음껏 들으며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때, 돌연 이명이 찾아왔다. 여태껏 느꼈던 그 어떤 고통보다도 잔혹하고 절망스러운 이명은 한참이나 귓속에 머물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소파에 앉아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귀는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허비 행콕의 피아노 소리가 여리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소리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두려운 일이었다. 소리가 귀를 통과하지 않고 지나쳐 가버린다면. 그는 급작스레 우울해졌고, 어떤 음악도 듣고 싶지가 않았다. 턴테이블에 올려두었던 블루노트 레이블의 재즈 앨범을 빼냈다. 이제 플래터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듣는다는 건 무엇인가. 소리를 듣고, 소리를 쓴다는 건 무엇인가. 소리를 읽고, 소리를 소리 낸다는 건 무엇인가. 그는 언젠가는 두 귀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올려두지 않은 턴테이블의 전원을 켜고 플래터를 돌렸다. 톤암이 서서히 내려앉아 바늘은 플래터를 긁어댔다. 적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원형의 허무한 회전은 그에게 울림을 전해주었다.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진실을. 책장에 꽂혀 있는 앨범은 그의 귀보다,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앨범이 아닌, 그의 귀다. 익숙한 듯 낯선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귀가 그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가.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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