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잠시 아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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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시 아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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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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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비 행콕의 ‘Speak like a child’를 들으며
오성은 작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유튜브 시대가 도래하기 약 30여년 전, 그야말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하던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방송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왜 나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예쁜 옷을 차려입고, 덧니를 샐쭉 내보이며 무대 위에 세팅된 테이블 끝에 서 있었다. 조명이 화려하게 무대를 비추자 로봇같이 커다란 카메라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였고, 나란히 선 동갑내기들은 긴장하여 마른 침만 삼켜댔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니 이미 스타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방송을 시작하게 된 건 20대 후반, ‘바다 소년의 포구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이후 라디오 게스트를 전전했고, 그 경험으로 여태껏 방송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이제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란 싹 사라졌다. 최근 ‘부산, 소설, 거기’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동요 속 열망이 아닌, 소설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은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휴대전화로 일상을 찍어 사람들을 자신의 채널로 불러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루는 두살배기 조카 앞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뻗어 손전화를 만들자 조카는 나와는 달리 손바닥을 펼친 채로 귀옆에 가져다 대는 게 아닌가. 레거시 미디어가 여전한 영향력을 펼치는 시대지만 이에 못지않게 뉴미디어는 우리의 삶에 스미어 나는 좀처럼 서툰 사람으로 살아가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LP를 찾는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이처럼 말하기


그래도 라디오는 텔레비전보다 편하고 자유롭다. 신경 쓸 일도 많고 제약도 많은 카메라 촬영보다 스튜디오에서 마이크를 앞에 두고 청취자와 공감하는 게 나로서는 더 즐거운 일이다. 요즘에는 부스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영상도 함께 송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문자 메시지나 메신저로 사연을 받고 신청곡도 틀어주고 있으니 확실히 아날로그적 감성이 살아 있는 매체다. 실시간으로 안부를 묻고 소통하고 있기에 일방적인 미디어는 아닌 셈이다. 라디오의 특성상 매주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기획력이 필수적이고, 나는 대체로 그런 일을 즐기는 사람임으로 나름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는 5월 5일에는 제법 신선한 미션이 주어졌다. 바로 그날의 주역인 아이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나 역시 그날의 주인공이었고,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많은 것이 변해버려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박상민의 ‘너에게로 가는 길’(슬램덩크 주제곡), N.E.X.T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영혼기병 라젠카 주제곡), 이선희의 ‘달려라 하니’(달려라 하니 주제곡)를 선곡했었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음악을 모두 바꿔버렸다. 요즘 아이들이 듣는 음악은 다를 거라고 지레 겁을 먹어 버린 것이다.

곡과 원고를 수정하고 난 후, 내가 찾은 앨범은 허비 행콕의 ‘Speak like a child’다. 블루노트에서 제작된 이 앨범의 커버는 석양이 지는 길가에서 허비 행콕으로 보이는 한 청년과 그의 연인이 입을 맞추는 실루엣으로 채워져 있다. 청년의 등 뒤는 낮은 철조망이 벽처럼 이어져 있고, 연인의 뒤는 그저 하늘이다. 풀잎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붉어지기 직전의 은은한 하늘은 이들의 마주함에 심도를 자아낸다. 사진의 깊이에서 한번, 그리고 제목에서 한번 울림이 전해진다. 아이처럼 말하기. 이제는 뒷면을 볼 차례다.



-잠시 아이가 되어

퓨전 재즈가 듣고 싶은 날에는 리 리트너나 래리 칼튼 같은 기타리스트도 좋지만 허비 행콕의 피아노는 옅은 미소를 선사해줄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답다. 무엇보다 이 앨범에서는 서정이 짙게 드리워진 연주를 펼쳐 정말이지 세상살이의 상념이 잠시 사라진다. 여린 건반음 사이로 들려오는 베이스 트롬본과 알토 플롯의 조화는 우리를 머나먼 여정의 길로 인도한다. 리드미컬하면서도 재즈의 돌연함을 저버리지 않는 명반이다. 그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서성이는 호기심 어린 영혼이 된다. 건반 위에서 나는 아이처럼 귀를 열고 세상을 받아들인다.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듣는다. 나는 잠시 아이가 된다.

뒷면을 펼치면 두 명의 아이가 재미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아이들이 노을 속 연인의 어린 시절인지, 혹 그들의 미래인지, 어쩌면 그들의 꿈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앞면과 뒷면의 사이에서 허비 행콕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는 셈이다.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흐르는 시간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이내 어린이날은 내게도 찾아올 것이다. 나와 마주 앉아 한 시간여 라디오를 진행할 그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아이처럼 말하기란 무엇일까. 오성은 작가(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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