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논에 물이 스며들며 일어날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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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논에 물이 스며들며 일어날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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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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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며칠 전부터 산책길 옆 논마지기를 관리하는 농부가 양수기(揚水機)로 북한강 물을 끌어올려 논에 대고 있다. 그는 한 달 전에 논을 전부 개간(開墾)해 땅을 뒤집어 놓았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았고 봄에도 비가 좀처럼 내리지 않아, 논바닥은 거친 돌처럼 건조하고 견고하다.

산책길 옆에는 논 네 마지기가 있다. 세 마지기는 거의 가로세로 50m 크기이고, 야산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있는 한 마지기는 길이 30m 정도 직사각형 모양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작년에는 한 마지기 논을 물로 충분히 채우는데 하루면 가능했다. 그런데 올해는 며칠째 북한강물을 대고 있다. 오늘 아침에 본 바로는 물이 논 2분의 1만 찼다.

상반기 농사를 짓는데 가장 중요한 작업은 건조한 논밭에 물을 대는 관계(灌漑)와 그 위에 모종을 심는 모내기다. 농부는 나의 주식인 쌀을 마련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농사’라는 인류 문명과 문화의 근간이 되는 농사(農事)라는 가장 중요한 의례를 매년 거행한다.

‘농사’라는 의미를 지닌 영단어 ‘애그리컬처’(agriculture)는 ‘마른 땅’을 의미하는 ‘애그리’와 그 땅을 가꾸는 행위인 ‘컬처’(culture)의 합성어다. 마른 땅에서는 생명이 탄생할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울 수가 없다.

‘문화’(文化)를 의미하는 영단어 컬처(culture)는 인간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자연과 신의 자비로운 섭리가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컬처’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고 관계하고 파종하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온 과정을 이르는 용어다.

문화는 한순간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선진국은 경제 강국이나 군사 강국이 아니라 문화 강국이어야 한다. 경제나 군사력은 경쟁을 통해 얻는 부를 통해 구축할 수 있지만, 문화는 온 국민의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얻는 성배이기 때문이다.

마른 땅엔 물이 필요하다. 물과 적당하게 섞인 땅은 파종된 씨를 품고 기적을 일궈낼 것이다. 인간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아담’은 마른 땅이 아니라 ‘물을 머금은 붉은 흙’이란 의미다.

함무라비 왕의 증손자인 암미-짜두가(기원전 1646~1626)에 기록된 홍수 이야기인 ‘아트라하시스’(Atra-hasis)에 인간 창조에 관한 장면이 등장한다. ‘아트라하시스’는 아카드어로 ‘너무 똑똑한 사람’이란 의미로, 성서에 등장하는 노아처럼 신들의 계획을 미리 알아 방주를 건조하는 영웅이다.

신들은 마른 흙을 인간이란 생명체로 전환하기 위해 거룩한 정결 목욕 의례를 행했다. 그들은 지혜의 신인 ‘웨-일라’(W?-ila)를 살해해, 그의 피와 진흙을 바탕으로 인간을 창조한다. 창조여신 닌투가 지혜의 신의 피와 진흙을 섞어 영혼을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위대한 신들이 침을 더해 인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침이란, 신의 정수(淨水)를 의미한다. 물은 진흙을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기반으로 변모시킨다. 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지만, 자신이 닿는 그 대상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마술이다.

노자는 ‘도덕경’ 8편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을 물과 비유한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 而不爭(而有靜)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상선약수 수선리만물 이부쟁(이유정)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이 문장을 풀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생명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습니다. 물이 가져다주는 선행이란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고요합니다.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가서 기꺼이 머뭅니다. 그러므로 물은 우주의 작동원리인 ‘도’와 같습니다.”

조용히 흐르는 물이 돌과 같은 흙덩이에 스며들어 서서히 변모시키고, 파종에 적당한 모판이 돼 기적을 부릴 것이다. ‘약수’(若水) 즉 ‘물과 같다’라는 표현에는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흘러 내려가려는 겸손과,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절제, 그리고 자신을 통해 그 대상에 이익을 가져다주겠다는 희생과 포용이 스며있다. 이 논밭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기적이 궁금하다.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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