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질문
  • 모용복기자
n번방 사건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질문
  • 모용복기자
  • 승인 2020.0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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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개설자 갓갓을 비롯해
주범 검거로 수사 마무리단계
全국민 公憤 불러일으킨 만행
사법부 처벌 수위 ‘관심 집중’
판사들 아동 관련 음란물범죄
3명중 1명 ‘3년형 적정’ 응답
국민 법 감정·상식과 괴리 커

‘갓갓’은 평범한 건축학도였다. 텔레그램 성착취물 공유 대화방인 ‘n번방’ 최초 개설자로 알려진 일명 ‘갓갓’으로 불리는 문형욱의 얼굴이 지난 13일 언론에 공개됐다. 경찰관 3명, 변호사, 대학교수 등 위원 7명으로 구성된 경북지방경찰청 신상공개위원회가 이름과 나이, 얼굴 공개를 결정한 데 따른 조치다. 문 씨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신상이 공개된 4번째 피의자다. 앞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공범 ‘부따’ 강훈, ‘이기야’ 이원호의 신상이 공개된 바 있다.

문형욱은 평소에 내성적이고 말 수가 적어 주변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논문대회에서 학과 교수, 동기들과 함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착실하다는 소리를 듣는 청년이었다. 문 씨 뿐만 아니다. 박사방 조주빈을 비롯해 디지털 성범죄 주범격인 대다수가 평범한 청년이거나 직장인들이었다. 이렇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삼이사들이 어쩌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악마가 됐을까.

문형욱은 텔레그램 상에서 가장 먼저 미성년자를 비롯해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인물이다. 텔레그램 대화방을 운영하면서 각각의 방에 번호를 매기면서 n번방이라는 속칭이 붙었으며, 조주빈이 이를 모방해 ‘박사방’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는 2018년 트위터의 일탈계에서 URL을 클릭하면 개인 신상정보가 넘어오게 하는 방식의 피싱을 만들어 피해 여성들을 회유,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했다.

경찰이 이번 사건의 원조격인 n번방 운영자인 문 씨를 포함해 주범들을 대부분 검거하면서 수사는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들에 대한 처벌 수위다. 경찰과 검찰은 조만간 수사를 매듭짓고 이들을 재판에 넘길 것이다. 그런데 전 국민적인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킨 만행에 대한 죗값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 큰 기대를 안 하는 게 좋을 듯싶다. 지난해 검거된 주범 중 한 명의 사례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 씨로부터 n번방을 물려받은 ‘켈리’ 신 모 씨가 지난해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그가 수사에 협조하고 반성문을 제출했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예상보다 형량이 낮았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항소를 하지 않았다. 형량이 너무 낮다는 시민단체의 비판이 일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공소장을 변경해 추가 기소하려 했지만 신 씨가 돌연 항소심 재판을 포기해 징역 1년이 확정됐다. 이제 5개월 후면 형 만기로 자유의 몸이 된다. 지난해 1월부터 8개월간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 9만1890여개를 저장해 이 중 2590여개를 판매해 2500만원의 부당 이익을 챙긴 범죄자치곤 형량이 너무나 가볍지 않은가. 아동 성영상물을 소지만 해도 10년 이상의 무거운 형을 받는 일부 선진국의 사례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범죄자가 고작 1년형을 받는 데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달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 범죄에 대해 설문조사를 해보니 판사들이 생각하는 ‘적정 양형’이 법정형보다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n번방·박사방이라는 디지털 성범죄가 전 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와중에도 판사들은 국민들의 감정이나 상식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대법원 양형위가 지난달 4~13일 1심 담당 판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아동·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 범죄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판사 668명 중 가장 많은 211명(31.6)가 기본 양형으로 3년형을 꼽았다. 법정형은 징역 5년 이상~무기징역이다. 최고형 문항은 9년형 이상이었는데 이를 선택한 판사는 고작 11명(1.6%)에 불과했다. 또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배포의 경우 응답 판사의 20%(132명)가 1년형을 가장 많이 응답했다. 이는 카메라 등으로 촬영한 영상물을 영리 목적으로 배포할 때 적용하는 양형 기준(징역 1~3년형)보다도 더 낮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소지죄는 더욱 가관이다. 이에 대해 6개월 형을 응답한 판사가 29.2%, 4개월 20.2%, 2개월 이하도 14.9%나 됐다. 미국에서는 징역 10년형 중범죄로 처벌하는데 우리나라 판사들은 단순히 재미나 취미 삼아 음란물을 즐기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뿐만 아니라 실제 아동 성범죄에 대한 형량도 터무니없이 낮다. 최근 몇 년간 통계를 보면 13세 미만 아동을 상대로 한 강간·성추행 범죄자 3명 중 1명 이상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하기야 8살 아이를 끌고 가 성폭행한 악마의 탈을 쓴 조두순에게 알코올로 인한 심신미약을 이유로 12년 형(검찰은 무기징역 구형)을 선사했으니 달리 말해 무엇 하리.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각종 성범죄가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배경에는 사법부의 책임이 크다.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과 온정주의가 성범죄를 부추겨 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n번방 사건은 과연 우리사회에서 사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재판에서 판사가 정하는 형량은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를 넘어 사회 전체에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다. 그 재판 결과로 인해 유사한 범죄가 기승을 부릴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피해자와 가족들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도 범죄자들은 고작 몇 년을 감방에서 보낸 뒤 다시 웃으며 거리를 활보한다. 이것이야 말로 불공정의 극치요 적폐 중의 적폐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디지털성범죄 사건에 국민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모용복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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