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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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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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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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야산은 이제 온통 녹음(綠陰)이다. 나는 매일 이곳을 순례(巡禮)한다. 이전엔 공부방 하얀 방석에 나의 지성소(至聖所)였는데, 지금은 나무로 가득한 이 야산이 내게 예루살렘이다.

아니 예루살렘보다 더 거룩하다. 내가 매일 매일 찾아와 경배를 표시하면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반려견 샤걀, 벨라와 함께 그 거룩한 공간을 매일 아침 찾는다. 동네 북한강 지류를 따라 한참 들어가면, 논밭이 나온다. 농부는 그곳에서 한참 써레질을 하고 있다.

좁고 진흙투성이 논두렁을 곡예를 하듯 지나가면 야산(野山) 입구가 나온다. 소나무, 전나무, 그리고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지난 3년간의 아침 산책이 이젠 이곳에 오솔길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장소’는 누가 들어가 길을 내기 전에는 금단의 지역이다. 하루하루 쌓인 우리의 발자국이 이젠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진 순례 장소를 만들었다. 이 야산은 하루를 시작하고 그날 묵상해야 할 주제를 떠오르게 만드는 빛나게 만드는 창조의 공간이다.

오솔길을 한참 따라 올라가면, 원만한 야산의 정상이 나온다. 그곳엔 커다란 두 갈래 길이 등장한다. 우리가 산책의 중간 기착지인 선착장 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선 왼쪽 길로 들어서야 한다.

그 갈림길 오른편에 문지기 한 분이 서 있다. 전나무다. 거친 나무 표면 위에 수많은 가지들이 솟구쳐 나왔다, 그 옛날 호모 사피엔스가 라스코 동굴에 그린 ‘메갈로케로스의 뿔’처럼 사방과 하늘로 치솟으며 자신의 위용을 뽐낸다.

아! 나무는 스승이다. 그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두 발을 땅에 디디고 높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느냐?” 살인자 모세는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으로 도망쳐 40년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지난 40년 동안 봐왔던 한 가시덤불이 그에게 말을 건다.

모세는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풀 한 포기의 음성을 들을 정도로 영적으로 개안된 것이다. 개안이 되는 모세에게 이 덤불은 신(神)이다. 덤불이 모세에게 말한다. “발에서 샌들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장소가 거룩함이 깃든 땅이다”

샌들은 유목민의 재산목록 1호이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훈장과 같은 물건이다. 모세는 샌들을 벗는다. 그리고 가시덤불 안에서도 신의 음성을 듣게 됐다.

이 전나무는 고독을 수련하는 거인(巨人)이다. 산수가 좋은 곳에서 유유자적하는 허약한 수행자와는 다르다. 그는 사시사철 눈, 비,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가지와 잎 사이로 쓸쓸하고 감미로운 노래를 들려준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는 이런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하다.

전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무한한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외치는 철학자 니체다. 그의 극복대상은 자신일 뿐이다. 어제와 다른 자신을 만들기 위해, 언제나 태양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다. 저 높은 가지에서는 와스스 소리가 나오지만, 전나무를 만든 저 땅속 깊은 곳에 존재한 뿌리는 영원한 침묵을 수련한다.

나무는 자신을 뽐내지도 비하하지도 않는다. 단지 자연의 순환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그때 그때 변모할 뿐이다. 그런 변화가 자연스럽고 옳고 진리다. 이 아름답고 의연한 나무보다 거룩하거나 훌륭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커다란 톱이나 도끼로 자신을 잘라도 내색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다친 곳을 태양에 드러내며 온 천하에 자신의 역사를 침묵으로 말한다. 몸통 안에 숨은 자신의 비밀인 원형 나이테로 지나온 상처, 투쟁, 고통, 행복, 불행을 증언할 뿐이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세월과 찬란하게 보낸 세월을 적나라하게 그저 보여줄 뿐이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다. 좁디좁은 나이테는 전나무가 얼마나 고통의 세월을 보냈는지. 그 고통의 흔적은 넓은 나이테 시절보다, 그를 숭고하게 변모시켰다.

아! 나무는 성전(聖典)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레바논 백향나무 숲은 지키는 훔바바(Humbaba)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해발 2500m 위에서만 자라는 백향나무는 바빌로니아, 이스라엘, 그리고 이집트의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는 데 사용됐다.

백향나무는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유프라테스강와 티그리스강을 통해 각 지역에 위치한 신전 건축의 가장 중요한 자재가 됐다. 백향나무는 물에 젖어도 뒤틀리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 향기를 가진 고귀한 물건이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백향목을 지키는 훔바바를 살해해 신들만이 지닌 명성(名聲)을 획득한다.

나무를 관찰하고 나무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진리를 경험한다. 진리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에서 뿌리를 내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모하고, 자신이 소중하게 믿고 있는 것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용기다.

나무는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나를 언제나 경청하면서도,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삶의 법칙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할 뿐이다.

아! 나무는 인자(仁慈)하다. 그의 속살인 인(仁)은 영원한 땅속으로부터 천천히 형성됐다. 그는 ‘인’을 자랑하는 적이 없다. 다만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끌어올린 물로 줄기, 가지, 그리고 잎을 시절을 쫓아 가지각색으로 표현할 뿐이다.

더운 여름날엔 인간들의 그늘이 돼주고 일 년 내내 새들에게 자신의 가지로 둥지를 만들도록 허락한다. 땔감이 필요한 인간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줘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 나무는 자기신뢰(自己信賴)다. 나무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자녀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나무는 누군가 심어놓은 조그만 씨앗의 신비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조그만 씨앗이 어떻게 저렇게 웅장한 나무가 됐는지, 자신도 모른다. 하루하루, 발을 땅 밑에 깊게 파묻고 머리와 팔을 하늘로 향하니, 어느날 그런 모습이 된 것이다.

인간은 불안이고 안달이다. 누군가에게 달려가 인정받고 싶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다. 나무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십시오.” 인간에게 불행은 가만있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

나무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불안하고 암울한 시대의 인도자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사방에서 조용히 알려준다. 미국시인 메리 제인 올리버(1935-2019)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시인이다. 그는 나무를 통해 배운 삶의 정수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나무들 사이에 있을 때’



내가 나무들 사이에 있을 때,

특히 버드나무들과 쥐엄나무 사이에 있을 때,

특히 너도밤나무, 참나무들, 그리고 소나무들 사이에 있을 때,

그들은 모두 나에게 기쁨을 내뿜는다.

나는 ‘그들이 나를 매일 매일 구원했어’라고 거의 말할 뻔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었다.

그 희망 안에는 선함과 현명이 존재한다.

나는 결코 이 숲의 세계를 성급하게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천천히 걷고 가끔 나무에게 인사할 것이다.

내 주위에서 나무들이 자신들의 잎을 떨며

나를 부른다. “조금만 더 머무르세요!”

빛이 가지들로부터 사이사이 흘러나온다.

가지들이 나를 다시 부르며 말한다.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도 이 세상에 이것을 하러 왔습니다.

편안하게 빛으로 당신을 채우십시오. 그리고 빛을 내십시오.”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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