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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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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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들으며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삼촌의 얼굴

잊고 있던 외이 드문드문 떠오른 건, 내가 삼촌이 된 이후다. 언제부터인가 은 희뿌옇게 머물다 흐릿해져 버렸다. 그런데 두 살배기 조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때면 여지없이 삼촌 해봐, 삼촌 해봐 재촉하게 되고, 나에게도 삼촌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삼촌과 판박이일 테다. 어쩌면 이렇게 LP를 듣고 쓰는 까닭이 삼촌에게 있는 건 아닐까. 통기타를 튕기며, 기타로 오도바이를 타자던 삼촌, 사촌 형들을 이끌고 당구장으로 노래방으로 호프집으로 전전하던 삼촌, 세월의 풍파에 점점 닳아버리고, 잊혀가는 삼촌. 할머니는 삼촌을 기다리며, 딸들의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 자리에 삼촌은 없었다. 집안의 대소사에도 조카의 결혼식에도 조카의 조카가 태어날 때도 삼촌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네 인생은 여지없이 앞으로만 흐른다. 그러다 가끔 굽어지고 휘어져 되돌아오거나 되돌릴 수도 없을 만큼 저만치 비켜나기도 한다. 또한 그처럼, 그 빛처럼, 그 시간처럼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



과거의 얼굴

한 줌의 재가 된 할머니를 품에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장례 버스의 가장 앞 좌석에는 밤을 지새 눈이 시뻘게진 삼촌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슬픔을 감당하고 있었고, 저마다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섬으로 가는 배가 있는 갯마을로 향했다. 언덕을 굽이 돌아 도착한 뒤로도 한참이나 사나운 바다의 성질을 감당해야만 했다. 할머니가 오랜 기간 딸들의 곁에서 요양 생활을 했기에 그야말로 몇 년 만의 귀향이었다.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선산의 입구는 웃자란 나무와 무성한 잡초로 막혀 사람을 들이기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모양새였다. 상복을 벗어 던지고 낫을 든 사람은 삼촌이었다. 삼촌은 풀을 베고, 작은 나무를 밀어 넘기고, 돌을 치웠다. 그곳에 도착한 사내 모두가 삼촌처럼 산을 베어 나갔다. 할아버지의 묘에 도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전과 달리 평탄해졌고, 숨어있던 산길마저 찾을 수 있었다. 이제 할머니를 모실 일만 남았을 즈음, 나는 줄곧 을 살피고 있었다. 삼촌의 속죄를 들추고자 함이 아니었다. 삼촌만이 모든 걸 감당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나는 그 얼굴에서 과거를 찾아 서성였다. 삼촌은 외가에 속한 모든 과거, 이 섬과 나의 할머니의 과거, 그 과거의 얼굴이었다.

산 아래의 터에서 자리를 잡고, 제를 지낸 음식을 나눠 먹기로 했다. 입맛이 없었던 나는 새끼 고양이를 따라 무리에서 멀어졌고, 옛 기억을 새록새록 더듬으며 마을을 살펴나갔다. 집은 몇 채 남지 낳았고, 사람도 얼마 없었다. 낮은 돌담 너머로 보이는 오래된 집들은 다른 세상처럼 낯설었다. 내친김에 할머니의 집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할머니의 구옥은 온기나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곳에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미의 마음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남진의 얼굴

나는 이곳저곳을 뒤지며 할머니에 대해 할머니의 삶에 대해 엿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삼촌의 물건과 삼촌의 사진과 삼촌의 과거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귀염받던 외손자라 해도 삼촌과 할머니의 관계에 관여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조금 더 슬퍼졌다. 한참을 뒤져 삼촌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 앨범을 찾았고, 나는 이미 짙은 슬픔에 지쳐 섬에서 이만 떠나고 싶었다. 그 앨범은 누런 때가 끼고 색이 바라 풀칠마저 힘을 잃고 너덜거렸다. 삼촌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까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런데 삼촌의 사진 사이에 건장하고 잘생긴 사내의 사진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가수 ‘남진’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진을 빼내어 얼른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그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태껏 그 사진을 어디에 두었는지 한참이나 잊고 있었다. 바로 이 음악, ‘가슴 아프게’를 듣기 전까지 나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묻어버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 사진을 앨범에 왜 넣어둔 것일까. 아니면, 삼촌이 넣어두었다가 잊은 것일까.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저 세월의 뜻에 가만히 두게 된 사진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남진의 노래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의 두꺼운 목소리가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오고야 만 것이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모든 게 바다 때문이라고, 바다 탓이라고 속절없이 눈을 감고 남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저 바다 때문이라고.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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