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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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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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 ‘가슴 아프게’2부
오성은 작가
오성은 작가
모든 건 사이에

근래에 입에 맴도는 영어 단어가 있다. ‘latency’라는 명사가 그것이다. 숨어있음, 보이지 않음, 잠복성 등을 뜻하지만 컴퓨터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지연시간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컴퓨터 사용자가 입력을 실행시킨 이후 곧장 출력값이 화면에 뜨지 않고 한동안 지연되는 현상을 말한다. 당연히 컴퓨터의 사양이 높을수록 ‘latency’는 줄어들게 될 것이고, 사용자는 끊김이나 버벅거림 없이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검색이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latency’가 유달리 선명하게 다가와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동안 외국에서 저렴하게 구입했던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한 탓도 있겠지만 점차 빨라지는 세상 속에서 무언가 지연되고, 내가 그걸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경하게 다가올 때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극과 반응 사이의 어떤 공간을 펼쳐 내주는 기분이라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내가 전자 기타를 치고, 앰프에서 소리가 나오기까지의 어떤 시간이나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저 별이 타오르고, 우리가 그 빛을 보기까지의 어떤 시간이나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어보자. ‘latency’는 제법 아름다운 단어 같다.



당신과 나 사이에

내가 남진 선생님의 ‘가슴 아프게’를 최근 방송(<부산 소설 거기>, 부산 KBS1)에서 부르고자 한 까닭은 물론 담당 피디와 작가와의 논의를 거쳤지만 내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전화 연결이 되면 안부도 묻기 전에 곧장 이 노래부터 불렀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 메어 운다」



한바탕 곡절을 맺으면 그제야 잠은 잘 잤니, 밥은 먹었니, 하는 안부가 오고 간다. 그야말로 어머니와 나의 애창곡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사실 가사의 속뜻은 몹시 슬프다.

어머니는 내게 바이브레이션이나 강약에 대해서 지적하며 이 노래는 그렇게 세게 부르는 게 아니라 애환을 담아 느리고 구슬프게 불러야 한다고 했다. 나도 여러 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여간 부르기 어려운 노래가 아니었다. 특히 남진 특유의 창법은 섬사람은 물론이고 뭍 사람마저도 애간장이 타도록 애처롭게 부른다. 곳곳에서 음을 당기고, 설익은 찹쌀이나 은행을 입안에 오물거리듯 여유로우면서도 도전적으로 가사를 고이고이 씹어먹는다.

그의 전성기의 화려함이야 트로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테지만 삼촌의 앨범 속에 들어 있던 바로 그 얼굴만은 한참 아랫세대인 나조차도 홀리게 할 정도로 멋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내가 요즘 곱씹는 ‘latency’와 꼭 들어맞았다. 노래의 도입인 ‘당신과 나 사이에’의 ‘사이’가 바로 이 ‘latency’였기 때문이었다. 그 공간에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로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더없이 가슴이 아파지는 것인데, 그 드넓은 바다야말로 내 어머니의, 우리 삼촌의, 나의 삶을 반추하는 거대한 세계이자, 아픔, 그리고 추억이기도 한 과거의 공간이다.



세월과 세월 사이에

어머니가 살던 여수의 섬 낭도에서 부산의 영도로 오기까지의 시간, 남진의 ‘가슴 아프게’가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되풀이되어 온 시간, 삼촌의 사진 사이로 남진의 증명사진을 발견하고 몰래 주머니에 넣고 온 그 시간, 내가 소설가를 이름을 달고 방송 출연을 하는 동안 이 노래를 굳이 바다 앞에서 불러야 했던 그 이유, 바다와 연락선과 갈매기와 부두가 모두 내 삶의 터전을 채우고 있었던 까닭, 그러므로 내가 이 노래를 무작정 잘 부를수만은 없고, 늘 버벅거리고, 망설이고, 지연하고, 실패한다는 변명.

나는 이 노래를 끝끝내 잘 부르지 못할 것이고, 그건 다름 아닌 ‘latency’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이라고 속절없이 터놓지만, 세월은 자꾸만 나를 앞으로 앞으로 당겨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순간이 몹시 서글퍼질 때가 있다. 나는 오래도록 이 노래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당신과 나 사이의 그 공간 역시.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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