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모든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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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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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야레 ‘Betty Blue’ (37°2 Le Matin)
오성은 작가
오성은 작가
-베티 블루

푸른색을 향한 음악이라면 어떤 악기로 연주한다 해도 좋겠다. ‘Betty et Zorg(베티와 조르그)’라는 제목의 스코어는 색소폰이 먼저 흐르고(그렇다 음악은 늘 흐른다), 이내 하모니카 소리가 살갗을 찔러댈 정도로 아프게 흐르고, 기타의 아르페지오가 곁에서 유유히 흐르다, 세 악기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하나의 색을 지시한다. 베티블루. 이건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블루다.

베티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집 안의 모든 것을 창밖으로 내던질 정도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철부지 소녀다. ‘철부지’라는 단어가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어떤 철부지도 히스테리만으론 집에 불을 지르진 않는다. 그 집은 자신이 사랑하는 조르그가 소설을 창작하는 장소이지, 불공평한 억압을 받으며 집주인의 시중이나 들어야 하는 못마땅한 장소가 아니다. 그녀는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내보이며, 집을 불태운다.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은 베티의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녀에게 타협이란 곧 ‘죽음’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바람이 불고 있어, 베티야

제12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받은 이 영화의 ost는 가브리엘 야레의 장난과 진지함이 충돌하는 것만 같다. 그들은(가브리엘 야레의 곡을 극 중 조르그와 베티가 직접 연주한다) 어린아이의 농담처럼 가볍고 유쾌한 강도로 건반을 누른다. 검고 하얀 피아노 건반은 오른손과 왼손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며 음과 음이 부딪히는 삶의 현장, 마음에 찾아온 혼동을 도드라지게 표현한다. 사랑이자 죽음, 블루이자 죽음, 하나가 될 수 없지만 헤어질 수도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친 사랑의 온도다.

‘C’est Le Vent Betty’의 아르페지오는 마치 물장난을 치듯, 닫힌 문에 노크하듯, 상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듯 신호를 보낸다. 어쩌면 그건 주파수를 잡지 못한 라디오의 잡음 같기도 하고, 간절한 모스 부호를 엿듣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모니카는 명확하게 길을 열어준다. 드럼과 기타가 뒤따르고,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음악의 방향을 직시한다. 여명이 열리는 하늘, 그 아래에 베티가 뛰어다니고 있고, 조르그가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바람이 불고 있어, 베티야.’ 스코어의 제목은 연인에게 건네는 더없이 다정한 인사다.



-37°2

누군가 내게 사랑에 관한 가장 참혹한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여지없이 이 영화를 골라줄 것이다. 가장 근사한 사랑을 보여 달라고 해도, 가장 단순한 사랑을, 가장 투박한 사랑을, 진실한 사랑을, 거짓된 사랑을, 모순된 사랑을, 완전한 사랑을, 사랑이 아닌 사랑을 알려달라 해도 이 영화를 선택할 것이다. 영화 <베티 블루 37.2 (37.2 Le Matin , Betty Blue. 1986)>가 사랑에 관한 모든 블루라 한다면 이 영화의 ost는 블루에 관한 모든 소리다. 아니, 단지 베티에 관한 모든 것이다. 혼돈의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 헤맨 자만이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의 소리다. 국경 없는 떠돌이의 음악이자, 원시적인 태초의 소리, 다시 말하자, 사랑하는 사람의 온도를 체감할 수 있는 소리다.

하지만 나에게 이 소리의 정체는 조금 버겁기도 하다. 생과 죽음의 충동이 담긴 순수한 여정에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나는 이 영화를 보았던 이십 대의 모습과 조금은 달라져 버렸다.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고, 오늘보다 내일을 힘겨워하고, 내일보다 모레를 걱정하는 삶. 나의 파랑은 어느새 짙어져 버려 깊은 바다에 잠겨 있다. 하지만 음악이란 폭풍우처럼 마음을 뒤집어놓고야 마는 존재가 아니던가. 베티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한심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베티를 닮은 음악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질 않은가. 37°2의 온도로, 사랑의 이야기로, 나의 청춘을 닮은 목소리로 파랗고, 파랗게.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학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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