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긴 터널, 돈보단 앞만보고 달렸지요 
  • 경북도민일보
‘인생’이란 긴 터널, 돈보단 앞만보고 달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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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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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중퇴로 대입 어려웠던 때
친구 도움 덕 청구대 토목과 입학
졸업 후엔 수리조합연합회 취직
댐 등 만들다 포항서 건설업 전환
포항시내 하수도·서산터널 등
동해안 관급 건설공사 도맡아
자신이 직접 건설한 서산터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취재를 마치고 기념사진 촬영
가족사진
현재 살고 있는 자택 문패
각종 감사패들이 지난날 화려한 경력을 말해준다.

포항 건설 1세대 큰손 김학수(하)

구룡포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야마구치, 시모노세키현에 도착했는데, 3~4월 이었나 봄에 출발해서 밤새 배를 타고 하룻만에 도착했다. 파도가 얼마나 거센지 현해탄에서 집채 만한 파도가 치더라. 한 배에 20여 명이 밀항을 했다. 일본에 배가 도착하니 사이렌이 앵~~ 하고 울려서 곧바로 체포돼 오무라수용소에서 한 달 정도 수용됐다가 아마 한 1000명 정도가 모이면 부산으로 강제송환 해 보냈다.

부산에 도착하니 창고에 가두어 뒀다가 보내주더라.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었는데 어찌 어찌해서 기차 타고 경주로 와서 포항까지 걸어서 왔다. 아마도 대구를 거쳐 경주에 오지 않았나 싶다.

△ 1951년 청구대학교 토목과 입학

1946년 포항중학교 1년 입학, 4학년 중퇴한 이 후, 고향에 와 있을 무렵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에 대학에 갔는데, 당시 청구대학교에는 법학과, 토목과, 문과 뭐 그렇게 밖에 없었는데 토목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학교를 중퇴하고 졸업장이 없어 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포항 남구 대송면에 있는 친구, 이상환의 도움으로 가게 됐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대학가려면 한 달에 쌀 한 가마니 비용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집에 와서 아버지와 상의하니 좋다고 해서 입학하게 됐다. 그 친구 자형이 포항중학교 교사였는데 입학서류를 다 해줬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던 거지, 나는 어찌됐든 포항중학교 3회로 졸업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처음에 청구대학교 들어갔는데, 내가 중학교에서도 공부라는 것을 했나, 뭐 어찌했겠노.

어려운 건축학과 공부를 하려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얼마만큼 열심히 했느냐 하면 우리 학과 입학정원 40명에 졸업은 10여 명 밖에 안 됐다. 우여곡절 끝에 1957년 3월에 청구대학교 토목학과 졸업을 했다. 졸업장이나 앨범은 촌에 놔두고 이사를 가면서 앨범이 없어졌다. 왜 군대를 안 갔느냐, 그 이유는 군대 갔다 오면 출세가 늦어진다. 나는 출세를 해야 하는데…. 그래서 결국 군대를 안갔다. 젊은 사람 소집해서 제주도 훈련소로 보냈다.



△첫 선 보러 갔는데 잘 못봤다

1953년 20세에 결혼했다. 6촌 제매가 자기 동네 처자가 있으니까 한 번 보자고 해서 이뤄졌다. 첫 선을 보러 갔는데 잘 못봤다. 나는 저기 숨어서 지켜보고 있고, 그 사람은 방에서 나와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만 보았다. 멀찌감치 서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았지 뭐, 그 시절 다 그랬지 선을 뭐 제대로 보고 간 사람이 있나.

첫날 밤에 초롱불 아래서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다. 방년 18세, 김말분. 남구 동해 지행면에 사는 아내를 그렇게 만나서 결혼했다. 내 나이에 보급대에 잡혀 군대가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고, 후손을 남겨 두어야 씨를 보전할 수 있다고 해서 서둘러 했다.

결혼식은 장기에서 했다. 동해면 학계리에서 금광리까지 30리나 되는 거리를 가마 타고 왔다. 그래서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김동율(65) 장남은 부산동아대학교를 졸업, 한보건설 부장을 지내고 지금은 이동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김경숙(61) 딸은 대구에서 공부했고, 서울에서 결혼해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 대학 졸업 후 수리조합연합회에 취직

대학 졸업후 취직을 했다. 수리조합연합회, 지금의 농어촌공사다. 수리조합에서 저수지, 수로, 댐 만드는 일을 했는데 일본에서 이 조합을 통해 일했고 토목직으로는 첫 직장 이었다. 당시 토목과 출신이 흔치 않으니까 도청 설계 공사 감독하는 자리가 최고의 자리였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나서 먹고 사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던 시절이었다. 직장 생활 하던 중에 군 미필자로 기피자로 밝혀져 결국 퇴직하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도중에 친구를 만나 약목(김천) 어딘가에서 기관사병이 나를 부르면 다음역에서 내리라고 해서 그대로 내리니 논산훈련소 수료했다는 귀향증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 건설회사 취직 포항건설에 첫발

1959년 당시 건설회사는 허가제였는데,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전문 자격증이 필요하던 시절이라 선영건설주식회사(김두선 대표이사)에 토목기사 2급 자격증 들고 입사해 공무부장으로 근무했다. 사장 아들인 전무가 중학교 동창이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대경토건(손진식 대표이사)으로 이직하면서 건설하도급으로 자영업을 시작했다. 5~6년 근무 후 자영업을 시작하게 됐다. 내 자격증은 다른 회사에 명의만 걸어 놓고 토목건설업을 했다.

동해안에서 활동을 아주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흥해상수도 공사를 낙찰 받고, 하도급 받아 제일토건으로 이직하게 됐다.

포항종합운동장 건설 공사, 포항시내 하수도 공사, 서산터널공사 등 포항과 동해안에서 건설관련 일들을 많이 했다. 나는 엔지니어였기에 일만 했지 사업은 할 줄 몰랐다.



△ 포항 건설 1세대의 큰손들과 함께

형산강이 세명고등학교 앞을 거쳐 거쳐 시내 칠성천을 통과해서 ‘나루끝’으로 흘렀다.

그래서 ‘나루끝’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연유다. 동해안에 관급공사 입찰을 보면 내가 다 맡아서 했다. 교통정리를 다했다. 건설 1세대 큰손이었다. 이동환, 이율로 등과 함께 건설의 큰손이었다. 지명입찰은 공사가 크고 공개 입찰을 작은 것만 붙였다. 대성건설이 운동장 건설 낙찰을 받았다. 본사의 분소가 다 포항에 있었던 시절, 공사비 1%를 받아서 떡값으로 받아서 나눠 주었다. 관습처럼 내려오던 시절, 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제일토건 소속으로 일하던 시절, 화성산업 포항지소장으로 있을 때 아마 그 때가 1980년대였다. 비로소 이러한 관습이 서서히 정리 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사는 서산터널 공사, 오거리에서 육거리 도로공사, 포항종합운동장, 영일군청에서 나오는 교량, 도로공사다. 나는 돈을 모르고 지금껏 살아왔던 것 같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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