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맞은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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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맞은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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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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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언니야.
간밤엔 바람소리에 잠을 설쳤어. 창밖으로 나뭇가지들이 크게 휘었다 젖혔다를 반복했지. 잠은 안 오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거실에 나와 앉아선 무심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어. 빈속에 커피를 만나 위산을 마구 뿜어대는 위장과 당장 베개를 내놓으라고 외치는 뇌세포의 이중주로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더라.

모든 게 흐렸어. 태풍의 끄트머리에서 종일 비가 내리는 날은 점심 먹으러 나서는 발걸음이 다른 날보다 확고하지. 무력한 심신을 환기하고 말겠다는 각오랄까. 대체로 둘씩 장우산 하나에 어깨를 포개 걷다가 양지와 숙주를 듬뿍 올린 쌀국수와 고기가 두툼하게 들어간 짜조를 곁들어먹거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수고가 아깝지 않은 생태탕집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어.

속을 낱낱이 훑어주는 깊고 칼칼한 맛이 부담스러운 날은 코너를 돌아 새로 생긴 분식집에서 국물떡볶이에 꼬마김밥을 푹 찍어 먹었어. 두툼한 우동사리를 국물에 말아 한 줄기씩 건져 먹다보면 비는 어느새 가랑비로 바뀌어 있곤 했지. 수면부족으로 침침하던 시력도 찬물에 씻은 듯 개운해지는 것 같고.

티끌처럼 가볍고 하찮았던 점심시간들이 그리워진 건 코로나19의 마스크 강박 때문만은 아니야. 번다한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의미의 점심, 하루 중 반을 갈라 ‘잠시 멈춤’ 하는 소중한 시간을 알 수 없는 대상에게 도둑맞은 기분이 들어서야.

우리는 저녁보다 점심을 함께 먹는 사람과 더 많은 일상을 공유하고 있잖아. 스트레스로 펴질 날 없는 이실장의 미간주름, 지나가는 칭찬에 고래처럼 춤을 추는 김대리의 자기애, 긴장할 때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양대리의 업무 패턴까지 우리는 알고 있지. 거북의 등껍질처럼 사연 많은 ‘사회인’의 갑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고 나오는 시간, 열두시 오 분.

오전 동안 뭉쳐있던 어깨와 미간이 점심시간을 지나 조금이나마 펴지는 건 여럿이 음식을 먹는 동안 이뤄지는 환기의 법칙 때문이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건 사회적 관계의 시작과 끝, 모든 것이지. 관계의 형태와 질에 상관없이 음식이 비워지는 시간과 공유한 추억은 비례해.

하루 중 혼자이지 않아야 하는 식사가 있다면 점심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아침의 넘치는 에너지와 저녁의 충만한 감성 사이에 있으면서 이성이 제 역할을 하지. 아직은 유머감각이 살아있는 시간대이기도 해. 협업이건 창의적인 일이건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어.

당분간은 느긋하고 무방비한 점심시간을 기대할 순 없겠지. 한 손엔 마스크 한 손엔 세정제를 챙겨 나서는 번거로움 속에서도 동료와 함께 마음의 점을 찍는 시간만큼은 소중히 여기기를 바라. 소란스럽고 무심한 동료들과의 특별할 것 없는 루틴이야말로 요즘같은 변칙의 계절에 필요한 일상의 힘이야.
안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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