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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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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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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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웨이의 <만추>를 들으며
-그해 시애틀의 가을

이 도시의 얼굴은 무채색에 가깝다. 채도와 색상은 차갑게 낮고, 오직 명도만이 하루의 나절을 힘겹게 드러내는 정도다. 이도 잠시 자욱한 안개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들어찬다. 남편을 살인해 복역 중인 2537번 죄수는 모친상으로 특별 휴가를 받는다. 시간은 오직 72시간, 수시로 위치를 확인해야만 한다. 트렌치코트에 긴 목도리를 여미고 나온 이 여자의 이름은 애나(탕웨이). 그녀가 올라탄 버스에 쫓기듯 수상한 남자가 올라탄다. 그의 이름은 훈(현빈). 그들이 탄 버스는 시애틀을 향한다. 바닥이 젖은 시애틀에는 기타 선율이 제격이다. 조성우 음악감독의 스코어는 사연을 가진 듯 서정적이면서도 묘한 긴장을 얹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야 도착한 애나는 너무 늦진 않았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다. 가족은 애나를 반기지만 어색하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기타는 노트(음계를 이루는 개별 음)를 반복하지만, 결코 같은 풍경은 없다. 시애틀의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남자와 여자,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이 세계에서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알아내기도 쉽지 않다. 애나의 72시간이라는 짧은 여정에 합류하게 된 훈은 잠깐의 환영이다. 훈에게는 애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애틀은 순식간에 재즈의 도시로 빠져든다. 시애틀에서 드물게 햇빛이 비치자, 수륙양용 오리배를 몰던 가이드가 말한다.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후다닥 갑니다.”

중국어가 모어인 애나와 한국어가 모어인 훈은 우연히 시애틀에서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낸다. 둘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그뿐이다. 애나는 이제 돌아가야만 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단 사흘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추

비가 내린다. 그리고 애나는 처음 만난 훈을 껴안는다. 시간을 녹여내는 화면에는 언제나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영화는 시간을 담는 사각형의 그릇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대부분의 소리가 절제되어 있다. 말하지 않고, 부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그래서 관객의 마음은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애나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도 끝이 났다. 그녀는 가야 한다. 뒤돌아서 자신이 지내는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은 애나의 편에 기대어 이 여정에 합류해버렸다. 그건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의 순간과 비슷하다.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거대한 고통이 애나의 몸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 버스는 흘러간다. 흘러간다고 해야 하는 속도와 움직임이다. 안개가 짙어져 나아갈 수 없자 버스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침묵으로 위장한 도시. 들려오는 여린 음악 소리. 암흑으로 치닫기 직전의 한숨 소리.



-가을이 온다

감옥에서 나온 애나의 얼굴은 이 도시와 닮았다. 절제되고 통제되어 있다. 애나는 충분히 힘겨운 일을 경험했으므로 삶에 모험을 걸거나 도전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모든 사랑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일어나는 잠시 동안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육신은 가을볕처럼 길고 가늘게 지다 결국 으스러지겠지만 사랑은 그 상태로 남아 어딘가를 부유할는지도. 만추는 시간에 관한 영화다. 그저 가을이 아닌, ‘늦은’ 가을이라는 제목 속에는 어떤 회환의 감정이 스며있다. 내게는 이 말이 늦은 사랑이나, 늦은 깨달음이라는 말로도 들린다. 애나는 기다린다. 기다림으로 무장한, 시간의 기다림으로 무장한 영화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오롯하게 나의 가을로 다가온 까닭이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다. 중문주제곡 ‘만추’가 실린 LP가 새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에 지나온 모든 가을이 응축되어 내게 온다. 손성제의 원곡 ‘멀리서’(비의 비가)는 탕웨이의 목소리에 의해 늦은 가을이 된다. 느리고 섬세한 통기타의 아르페지오가 길고 긴 가을들을 소환한다. 내게 가을은 지나온 모든 가을을 포괄한 하나의 풍경에 가깝다. 아득하게 멀고도 그리운, 돌아갈 수 없는 불투명한 이미지다. 손을 뻗어 닿고 싶지만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고, 좀체 만져지지 않는다. 내게 가을은 사라질 것 같은 허상이자, 허깨비다. 유령의 목소리이고, 정지된 시간이다. 영화다, 만추다, 한참 동안 머무른 늦은 가을이다. 오성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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