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흐른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맛’
  • 경북도민일보
반세기 흐른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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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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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되던 해 집나와 포항으로
역전 앞 구두방 여주인이 거둬줘
19살까지 어머니로 모시며 살아
친구따라 경주로 취직하러 갔다
막걸리·돼지고기·닭고기 등 팔아
식당의 길로 들어서게된 첫 시작
남편과 함께
신라식당 개업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라식당 앞에서 가족과 함께
포항 송도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즐거운 한 때

50여년의 세월 속 맛·전통 이어가는 서말순 여사<상>

△육남매 중 막내로 8살때 집 나와

포항 북구 흥해읍 달전리가 내 고향이다. 어느 날 언니들이 고구마 삶아 먹다가 내가 나타나면 숨기고 주지 않았다. 먹는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그래서 내가 그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속이 상해서 언니들에게 마 욕을 좀 했는가 보다, 그 길로 내 나이 8세 때, 피난 후, 바로 집을 나왔다.

소티재 넘어 걸어서 포항으로 나왔다. 그 거리가 얼마나 멀었는지.

그 길을 걸어서 나왔다. 우리 오빠 셋 중에 경찰도 있었는데 형사반장까지 했고, 돌아가시기 전에 국장도 지냈다. 내가 집을 나간 후, 엄마 가 돌아가시고 나서 언니가 나를 데리러 왔더라.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너무너무 서운했다. 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난 안 돌아간다고 했다. 피난 갔다가 온 후에 형제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지금도 어머니 산소가 달전에 있다. 지금도 내가 지키고 있고, 부모님 두 분 다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오빠가 돌아가실 때, 다 되어서 한번 보고 싶다고 해도 난 가지 않았다. 내가 그만큼 어려서부터 독했는가 보다.

내가 집을 나와서 어디 갈 곳이 있었겠나.

포항역전 앞에 구두방이 하나 있었다. 내가 어디 오갈 때 없다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구두방에 여주인이 나를 받아 주었다. 구두방에 실을 박아서 구두를 만들던 시절에 내가 실이라도 감을 수 있다고 부탁을 했다. 그분이 나를 키워 준 어머니로 나는 이곳에서 19살까지 살았다. 그때 역전은 포항 최고의 위치였다. 그 어머니가 충남식당이라고 구, 포항역 뒤 세탁소 자리에서 개장국장집, 개고기집을 했다.

원래 류외순 어머니 고향은 전라도인데, 충남으로 시집을 가서 이름을 충남식당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똑똑해서 나를 잘 해 주었다.

그 어머니가 이 식당 자리의 땅을 사라고 권했다. 어머니가 계를 해서 돈을 많이 모았다. 나 한테도 곗돈을 받으러 와서 매번 권했다. 이 땅이 그때 신라식당 자리, 이곳은 갈밭이고 뻘이었다.

어머니가 자식이 없어서 나를 딸처럼 키워주었다. 그 어머니가 오래 살아계셨으면 나는 벌써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84세에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식당도 하고 구둣방도 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녀가 없으니까, 친정 조카들에게 다 들어갔다. 그 아이들이 나를 엄청 좋아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서 이 땅을 샀겠나.

△경주에서 첫 식당 길로 들어서다

내 나이 19살, 그때는 희망이 없었다.

내 친구 하나가 경주에서 외삼촌이 가마솥 공장을 한다고 취직하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친구와 함께 경주로 도망갔다. 막상 가 보니까 적막하더라. 겁이 나서 그 친구는 집으로 와 버리고 나는 떨어져서 막막하더라. 경주역전 파출소 뒤 큰길가에 대구 재제소가 있었다. 그 앞에 문 짜는 공장이 있더라. 그 문 공장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제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부탁을 하니까 그 오빠가 말하기를 내 아내가 막내를 낳았는데, 한 2주간 봐주면 안 되겠냐고 해서 그 집, 성건동 신선술도가로 가게 되었다. 도로는 높고 집은 낮은 곳, 성건동 북천내로 갔다.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여관을 하던 집, 처마 밑에 조그맣게 가게를 내서 막걸리를 팔기 시작했다. 막걸리 한 말에 25원인가 했다. 그때 돈으로 60원을 내 주었다. 쌀 한 되에 7원 하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식당의 길로 들어서게 된 첫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 안돼서 막걸리 하면서 국수를 삶아서 재제소에 배달했다. 돼지고기, 닭고기를 뽂아서 접시에 올려 30원 받았는데 줄을 서더라. 닭고기도 뼈 채 찧어서 당면으로 끓여 내놓으면 맛이 끝내 주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식당의 길로 들어서게 된 첫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내 나이 19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장사가 너무 잘 되니, 경주 우체국 옆으로 가게를 확장 이전했다. 나는 잠이 없다. 그래서 부지런하다. 그때는 죽을동살동 모르고 살았다. 그러던 중 이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우리 영감은 그때부터 말이 없었다. 성격이 대쪽 같았고, 의리는 끝내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도둑질하면 절대 안 되었다.

경주서 식당하면서 돈을 벌어서 황오동사무소 앞 황오시장으로 이사했다. 황남빵 바로 뒤편에 자리 잡았다. 돈을 잘 버니까 경주시 위생계에서 나와서 장사를 못하게 했다. 나는 공무원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글자도 모르는 무식쟁이니까 한 번은 알려 줄 수 있지 않느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며 사정사정했더니, 바로 다음 날 허가를 내 주더라. 내가 지금도 장사를 하지만, 경우에 빠지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1971년도 경주에서 포항으로 이사

그래서 120평 땅을 구입하고 단층 건물을 지었다. 장사하면서 가게 뒤의 땅을 더 사 넣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 포장마차로 시작했는데, 오대홀이라는 나이트클럽이 하나 있었고, 허름한 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소고기 갈비를 팔았다. 그때부터 소찌개를 했다.

소찌개는 경주에 있을 때부터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갈비 먹으려면 좀 사는 사람들이 먹으러 온다. 서울에서 해병대 입대하려고 와서 여기서 밥 먹고 갔다. 포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죽도시장 가면, 우리 가게를 소개시켜 준다고 합디다. 그렇게 입소문이 퍼지면서 알려지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근처에 남도예식장에서 결혼하고 우리 집에 갈비탕 먹으러 왔다. 그때는 하루에 2000 그릇 이상을 팔았다. 직원들이 열다섯 명 이상이 일했다. 돈을 셀 수 없을 만큼 잘 벌었다. 소찌개는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맛을 자랑하고 있다.

처음에 건물 지을 때가 한 20년이 지났다. 여기는 뻘이어서 지반 강화를 위해 전봇대 50개 이상을 박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녀 넷을 공부시키는 것밖에 없다. 비행기가 있었나, 기차 타고 그래 서울까지 다녔지. <계속>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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