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이스와 루이지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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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와 루이지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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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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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위 얼굴’이 없었으면 미국 북서부의 작은 주를 과연 우리가 기억할 수 있을까. ‘큰 바위 얼굴’과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이곳은 최근 두 번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립기념일에 ‘큰 바위 얼굴’을 배경으로 연설을 해서였고, 다른 한 번은 오토바이 축제 ‘스터지스 모터사이클 랠리’ 때문이다. 모터사이클 축제가 벌어졌을 때 참가자들은 단 한 명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축제에 참가했다고 국내 언론이 보도했다.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짐작하는 것처럼 ‘다코타’는 이 지역에 오랜 세월 살아온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미국 동부 기준으로 보면 남·북 다코타 주는 첩첩산중에 있다. 선거인단 수도 남·북 합쳐 봐야 고작 6인이다.

미국 여권에는 사우스다코타 러시모어 산에 조각된 네 명의 대통령 상 사진이 실려 있다. 왼쪽부터 조지 워싱턴(초대), 토머스 제퍼슨(3대), 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 에이브러햄 링컨(16대)이다.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루스벨트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결정한 사람이다. 파나마 운하 개통으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해 20세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현했다.

이제 남은 인물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인은 왜 그를 ‘큰 바위 얼굴’로 기리고 있을까.

구대륙 유럽에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신대륙 북미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다. 그 전장(戰場)이 퀘벡이었다. 1759년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북미의 주도권을 잃게 된다.

1776년 독립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신생국 미국은 뉴잉글랜드로 불린 동부 해안가 13개 주를 차지하고 있을 뿐.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거대한 프랑스 땅인 루이지애나와 중심 도시 생 루이가 있었다.

그 지역을 넘어 안쪽 중앙부로 들어가면 광대한 평원은 원주민(애버리진)의 터전이었다. 현재의 캘리포니아는 스페인 땅이었다. 쉽게 말하면, 독립 당시 미국영토는 현재 미국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3대 대통령 제퍼슨의 업적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다.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현재의 미국 영토를 완성한 이가 토머스 제퍼슨이다.

이제 프랑스 땅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거대한 땅덩어리는 캐나다와의 국경선인 북위 48도에서 남쪽 멕시코만에 이르는 212만㎢. 제퍼슨은 이 땅을 1803년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다.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벌이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전비(戰費) 확보가 시급했다.

식민지 시대 개척자들은 지명을 지을 때 편의상 본국의 대표 도시 이름 앞에 신(New)을 붙이곤 했다. 뉴욕(NewYork)이 영국의 요크(York) 앞에 신(新)을 붙여서 태어난 것처럼. 하긴 영국보다 먼저 뉴욕을 차지한 네덜란드 개척자들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도시를 ‘뉴 암스테르담’이라고 명명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누보 오를레앙은 100년 이상 캐나다 퀘벡주처럼 프랑스 고유 문화를 유지·발전시켜왔다. 재즈(Jazz)가 뉴올리언스에서 발원한 것은 이런 프랑스 문화가 기본 베이스로 작용한 결과다. 프랑스 문화에 ‘흑인 소울’ 음악이 결합되고 다시 미국 문화가 덧붙여진 하이브리드가 재즈다.

최근 나는 프로야구 투수 김광현으로 인해 옛 프랑스 땅, 루이지애나를 떠올리곤 한다. 올해 MLB에 진출한 김광현이 투수로 뛰고 있는 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김광현이 선발로 출전하면서 중계방송 때마다 홈구장 부시스타디움과 세인트루이스 시가지를 살펴보게 된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1882년 창단된 팀이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다. 김광현은 지금 138년 역사의 MLB 팀에서 공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 중부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독립보다도 역사가 더 길다. 프랑스 탐험가들이 이 지역에 도착한 게 1673년. 미시시피 강에 면해 있는 교통의 요지가 마음에 든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생 루이(Saint Louis)로 명명한다.

프랑스는 생 루이를 거점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진출해 프랑스령을 확대해 나간다. 캐나다와의 국경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는 거대한 식민지 ‘루이지애나’가 이렇게 탄생했다. 루이지애나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바로 생 루이다. 물론 프랑스가 북미에만 ‘생 루이’를 붙인 것은 아니다. 한때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세네갈에도 생 루이라는 도시가 있다.

프랑스 개척자들은 왜 ‘생 루이’를 식민지에 붙이려 했을까. 루이(Louis) 프랑스 남자 이름이다. 814년 왕의 이름에 처음 등장한 루이는 루이 5세…루이 9세…루이 14세를 거쳐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국왕들의 이름이었다.

이 지점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어떤 연유로 역대 왕들의 이름 앞에 성인을 뜻하는 생(Saint)이 붙어 고유명사로 굳어졌을까.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섬이 시테섬이다. 파리의 기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의 무대가 바로 시테섬이다. 시테 섬과 거의 맞닿아 있는 작은 섬이 생 루이 섬(L‘ile de St. Louis)이다.

루이 9세는 13세기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가 불귀(不歸)의 객이 된 왕이다. 프랑스는 루이 9세를 기리려 왕의 이름 앞에 생(Saint)을 붙였다. 그때부터 루이 9세는 성인(聖人)으로 승격돼 ‘생 루이’(St. Louis)로 불렸다. 고유명사 ‘생 루이’가 처음 지명으로 사용된 곳이 센 강의 섬이다.

이후 프랑스의 지명, 학교명 등에 ‘생 루이’가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는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생 루이’를 하나씩 붙여 나갔다. 미시시피강에 면한 미국 중부의 마을이 ‘생 루이’로 탄생한 배경이다.

‘생 루이’는 1925년 세계적 대사건에 또 한번 그 이름이 등장한다. 우편항공기 조종사였던 린드버그는 세계 최초로 33시간 무착륙 대서양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린드버그가 몬 비행기가 바로 ‘더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The Spirit of Saint Louis)였다.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을 준비하면서 뉴욕을 이륙해 착륙의 목표 지점으로 정한 곳이 에펠탑의 도시 파리였다. 북미에 진출한 ’생 루이‘가 250년 만에 린드버그와 함께 금의환향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으로 린드버그는 세기의 영웅이 되었다.

그 후 95년. 우리는 왼손 투수 김광현의 볼 끝에서 세인트루이스의 영광을 간접 경험하는 중이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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