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시장 터줏대감, 포항의 아침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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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시장 터줏대감, 포항의 아침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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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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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3시 하루일과 시작
새벽 5시 종소리와 함께 개장
부모님 여의며 소년가장된 후
가장이란 책임감에 잠 없어져
군대 경리병과서 근무했는데
직업과 연결되며 공기업 입사
대통령 표창패 앞에서
아내와 해외여행 때 모습.
정부웅 씨
총무차장 근무시절.
죽도시장 신포항수산 정부웅씨<상>

◇내 일과는 매일 새벽 3시부터 시작

“거의 10년동안 매일 새벽 3시면 죽도시장 사무실에 나와 하루 일과를 시작하니까 포항에서 아침을 제일 먼저 여는 사람들 축에 끼일깁니다.”

죽도시장하고 직접적인 인연이야 10여년 밖에 안되지만 50년 넘도록 바다에서 잡은 생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니 몸에서는 생선비린내 냄새가 떠나지 않는다. 사무실 옆에 딸린 조그만 숙직실에서 전기장판 깔고 자다가 새벽에 수산시장 운반과 하역을 담당하는 노조원들이 나오면 내가 먼저 나와 사무실 불을 켜야 하니 새벽 3시쯤 되면 자동적으로 눈을 떠서 나온다.

그러면 10여명이 되는 우리 직원들이 4시쯤 나오고 이어서 죽도시장 경매사들의 종소리가 새벽 5시쯤 울리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시장이 깨어나고, 포항도 깨어난다.

(주)신포항수산주식회사가 하는 일은 수산물을 위탁받아 판매하는 일이라 이렇게 항상 싱싱한 수산물을 만나고 있으니 나이에 비해 젊다고 한다. 죽도시장의 하루는 사실 내가 출근하는 새북(벽) 3시보다 더 올라가 새벽 한 두시쯤부터 꿈틀댄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가 새벽 한 두시만 되면 인부들의 손을 거쳐 시장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중도매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매가 봄, 여름, 가을에는 5시에, 겨울철에는 보통 5시30분부터 2시간 이상 열리고 이렇게 경매가 끝나고 정리한 후 다음날 업무계획이 나오고 나면 직원들은 낮 12시쯤 퇴근하기 시작하지만 나는 퇴근못한다. 직원들이야 일반 회사보다 5시간 일찍 출근했으니 일찍 들어간다. 그러면 사무실은 텅비어 적막감이 든다.

점심을 간단히 시장에서 먹고나서 식곤증이 올 무렵, 여기저기 거래처에서 내일 하역과 판매에 따른 문의전화가 회사로 오기 때문에 오후 내내 머물며 전화받는 일을 한다.



◇지금도 회사 숙직실로 퇴근한다

이렇게 일하다 저녁 7시쯤에야 뒷방으로 퇴근한다. 퇴근이라 해봐야 마누라가 기다리는 집이 아니라 두세평 남짓한 사무실옆 숙직실이다. 아이들도 다 출가했고 손주놈들도 멀리 있는데 뭐 그래서 집에는 잠시 들려 옷이나 갈아입고 나온다.

집사람도 칠십이 넘었지만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다. 손자 용돈이라도 주기위해 이 나이에도 숙박업을 한다. 이렇게 하루가 저물면 저녁 9시 뉴스를 보면서 세상돌아가는 것도 보고 신문도 읽고하다가 잠이 드는데 한 4시간정도 자면 눈이 번쩍 뜨져 출근한다.

직원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왜 그렇게 잠이 없냐”고 묻는데 그때마다 내가 해주는 답변은 “원래부터 없었어” 라고….

정말 그랬다. 어릴때부터 잠이 없었다. 잠이 없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1 때 아버지 돌아가신뒤부터 잠 없어져

내가 중1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고1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남으로 소년가장이 되면서 책임감 때문에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님 다 여의고 가정과 동생을 보살핀답시고 새벽일찍 일어나 논 밭이라도 둘러보고 자전거타고도 1시간이 더 걸리는 학교에 다닐려면 친구들처럼 따스한 방에서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생때부터 새벽 5시전에 일어나도 잠이 부족하지 않더라고. 그 후에 직장일도 결산작업, 원가분석 등 경리업무를 맡아 한달에 십여일 이상 밤샘근무를 해야 해서 잠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한 50년정도 수산업과 관련된 일을 해서 지금 죽도시장 터줏대감이 된 사연부터 꺼낸다.

원래 우리 집은 경산이다. 아버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기골이 장대하고 잘 생기셨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 친정이 있는 이곳 영일군 연일로 식구들이 몽땅 이사를 오게 됐다. 일제 강점기때 아버님이 조선사람에게는 일본말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맞서다 일본순경들에게 매맞고 칼부림까지 당해 입술이 크게 찢어지는 일도 당했다.

그때 할머니는 아들 죽이겠다 싶어 선생질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며느리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식구도 많았다. 위로 누나가 셋, 실은 네명인데 큰누나는 어릴 때 죽었고 내가 첫 아들로 장남이고 일곱 살 아래 또 남동생이 태어 났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3년, 고등학교 1학년때 어머니 마저 돌아가셨다. 부모님 이 금슬이 참 좋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아버지를 못잊어 하시더니 3년만에 뒤따라 가셨다.



◇어렵게 다닌 동지상고 야간부

사실 누나의 권유도 있고해서 아버지가 가신 선생님의 길을 가려고 대구사범고등학교 시험치러 갔다가 실기를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부모님을 다 여의고는 가정이 어려워 동지상고 2부를 다녔는데 연세대 대학원 동문들과 함께일 집에서 통학을 했다. 오후 5시에 수업시작해 9시 넘어 마치면 밥은 집에 와서 먹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집에 걸어오면 1시간이 훨씬 넘게걸려 밤에는 정말 무섭기도 했고. 그렇게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자전거사고로 휴학하고 6개월동안 병원에 있던 중 군대영장이 나왔다. 사실 그때 부모님도 안계시고 의가사전역 대상자인데도 삼촌이 남자라면 군대는 꼭 다녀와야 한다고 해서 무작정 입대했다.

군생활을 춘천 8지구경리대에서 했는데 경리대는 말하자면 군대은행이라 불리는 곳이다. 동지상고에 다닌 경력에다 군입대 적성검사에서 우수한 성적이 나와 경리병과로 차출됐는데 이게 나중에 직업과 연결이 됐다. 배우는데 관심이 많아 군생활중에서도 춘천농대 야간부도 청강하고 1968년 군 제대후 복학하자마자 졸업도 하기 전에 공채로 공기업인 대한종합식품에 합격했다. 월남전에 전투식량을 공급하는 업체로 인기가 좋았다.



◇수백대 일 경쟁 뚫고 공기업 입사

이 회사는 월남전 전투식량 공급업체로 서울 덕수상고에서 시험을 쳤는데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다.

수산업과 인연을 갖게된 건 바로 이 첫 직장이 구룡포공장으로 발령나면서 시작됐다. 통조림 가공일을 했는데 직원도 수백명이지만 관리직은 대부분 퇴직 군인이었다. 하지만 월남전이 끝나면서 정부의 민영화정책으로 회사가 민영화되자 정부에서는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게 바로 구룡포에 있던 ㈜동수인데, 회계와 경영이 전공이다보니 관리책임자인 차장을 맡게 됐다.

구룡포 뿐만아니라 라스팔마스 등 원양어업을 통해 원해산 명태를 들여 와 길게 자르거나 가공해 명태쉬부록으로 일본에도 수출하고 그랬다.

결혼은 공기업인 대한종합식품때 했다. 26살때였다. 우리가 연일 살때인데 엄마 역할을 하던 누나가 지금의 집사람이 명절 때 큰 아버지댁 제사때 와서 음식하고 주방일 돕는 걸 눈여겨 봤던 모양이다. 여차여차 해서 그 집에 아가씨 선을 보러 갔지. 25살 때인데 그날은 눈이 참 많이 왔다. 그런데 첫 대면은 마음에 안들었다. 왜냐하면 총각이 왔는데 고개만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안보여 주었다. 수줍은 것은 좋지만 너무한다 싶어 집에 와서는 누나한테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

◇“사람 됨됨이를 먼저 봐라” 누님의 불호령

그런데 누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니가 그렇게 잘났나. 조상도 모셔야 하는데 사람 됨됨이만 보마 되지, 인자 부모님 제사도 다 니가 모셔가고 니 동생도 니가 챙기라”고 꾸지람했다. 하도 혹독한 면박을 받은 터라 다시 한번 더 보기로 했다. 내가 전화해서 두번째 만나 죽도시장 맞은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당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인가를 보고 아카데미극장 앞 부산각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먹으면서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누고 했는데 다시 보니 교양도 넘치고 단정했다. 그래서 선 본지 한달 반만에 날을 잡았다. 26살 때 23살 김정순과 결혼식을 올렸다.

첫 신혼집은 직장이 있는 구룡포 병포리 문화주택에서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집 주인 이름도 안 잊어버린다. 수협다니는 양진철씨다.

그런데 내가 선보고 하는 동안에도 장인 장모님 처삼촌까지 내 뒷조사를 많이 했다. 그런데 동네사람이 “그 총각 주머니에 돈들어 가면 돈 안나온다”라고 검소하고 정직하다는 말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1년뒤 27살 때 큰 아들을 낳고 그 애가 지금 쉰살이다. 둘째와 세째를 포항에서 낳았는데 다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큰 아들, 작은 아들 모두 아버지 사업 도와

큰 아들은 포항고를 나와서 충북대 거쳐 현대그룹에 특채됐는데 내 동생이 큰 부도를 당하자 회사를 포기하고 내려와 엄마와 우유대리점사업을 함께해서 가계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은 죽도시장에서 냉동창고 업무를 총괄한다.

둘째 아들은 경찰대학에 합격해놓고도 적성에 맞지 않다고 외국어대에 입학했다가 군대다녀와 미국 유학을 거쳐 산업정책연구원과 진학사 등 에서 기획일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아부지 일 배우러 내려온나 해서 요즘 우리 사무실에서 함께 일한다.

큰 아이는 딸인데 이 두 남동생을 잘 보살펴 줘 든든하다. 진학이며 결혼이며 다 꼼꼼이 챙기고 특히 한국표준협회 간부인 사위도 좋다. 난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고 싶어도 못됐는데 지금 며느리 둘 다 교편을 잡고 있다. <계속>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신포항수산의 새벽경매 모습.
연세대 대학원 동문들과 함께
삼남매와 가족들
북한 개성 선죽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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