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정주영과 함께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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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정주영과 함께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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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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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이들 걷는다. 제주 올레길, 서울 양재천길 부터 시작해서 전국에 이런저런 길들이 있다. 해외에는 각종 트래킹과 트레일이 있다. 멀리 스페인 산티아고순례길 까지 다녀들 오고 남미 파타고니아에도 걷기 위해 간다.

걷는 행동에는 마음의 진정과 정서적 선순환이 따른다고 하는데 ‘하염없이 걷는다’ 라든지 ‘빗속을 걸었다’ 같은 말들이 상징한다. 필자 주위에도 특히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종일 그냥 걸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는 절망적인 상황이나 인생의 전환점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도전한다는 4천 킬로미터의 극한 코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도 있다. 52일이 기록이다. 그러나 길과 걷기를 심기일전과 심리적 부양의 기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산 정주영은 일제강점기, 열일곱 살이던 1931년부터 모두 네 차례 가출했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자란 총명하고 꿈많은 소년 정주영은 어떻게든 바깥세상에 나가 인생을 개척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집을 나왔다. 가출하는 소년이 돈이 있었을 리 없다. 걸었다.

첫 번째 가출 때는 청진까지 걸어 올라갔다. 보름이 걸렸다. 두 번째 가출 때는 서울을 향했다. 금강산을 가로질렀다. 짚신을 신었을 것이고 가난한 소년이 옷이라고 변변했을 리 없다. 회고록에 눈 덮힌 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추운 겨울이었을 것이다. 밤을 세워 걷기도 하고 산사에서 신세도 졌다. 그렇게 사흘을 걸어 김화군 두목리라는 지명의 아마도 오늘날의 철원 지역에 닿았던 듯하다. 친척 집에서 하룻밤 신세지려고 했는데 미리 아버지의 전갈을 받아있던 당숙께 막혀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 번째에는 그 유명한 소 판 돈 70원을 몰래 갖고 나왔고 네 번째에는 친구한테 돈을 빌려 밤차로 청량리에 갔다.

십대 소년 정주영은 큰 꿈을 품고 집을 뛰쳐나와 고생스럽게 서울로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가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경제 대국이 되고 자신은 훗날 세계사에 남을 큰 기업들을 창업해 성공적으로 키우고 이 땅에서 가장 큰 병원을 세울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계 1위가 될 조선소를 짓고 내노라 하는 일본 회사들을 따돌릴 글로벌 5위권 자동차 회사를 만들 것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66년 세월이 흐른 후에 소 판 돈 70원을 갚기 위해 1001마리의 소를 몰고 고향을 찾을 것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은 그냥 좀 더 나은 미래를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역사는 바로 그 길에서 시작되었다.

‘옛날에 누가 이 길을 따라갔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로마 근교 압피아 가도를 잠시라도 따라 걸어보면 로마 역사 전체가 바로 마음에 와닿는 것 같다. 철학이 독일 모든 대학에서 필수과목이던 시절 학생들이 개척했다는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에서는 2킬로미터 밖에 안되지만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랬을 것으로 상상하면서 뭔가 깊이 생각하면서 걸어야 할 것 같다.

소년 정주영이 고향에서 서울로 걸어 내려오던 ‘정주영 트레일’은 대부분 북한 지역이라 통일 후에야 따라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아산이 생전에 자주 왕래했던 제2의 고향 강릉과 서울을 잇는 길을 한번 걸어보아도 좋겠다. 소년 정주영과 마음 속으로 함께 걷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뭐든 내면의 정리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전과 창업정신이 예전 같지 않은 지금 청년들이 정주영이라는 입지전적 거인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혼자 또는 삼삼오오 길을 따라 걷고 인생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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