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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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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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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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산을 헤매다 돌아가는 길, 바람 한줄기 지나갈 때마다 이른 낙엽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포롱거리던 새들도 둥지로 들었는지 자취를 감추고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서산의 노을이 핏물처럼 붉었다. 만감에 젖어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짓쳐드는 허무에 온 몸이 저려왔다. 지친 몸 잠시 쉼을 주고자 이름 모를 영마루 푸서리 무성한 무덤가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며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다 손길을 그만 멈추고 말았다. “지금은 낙엽을 밟으며 세상으로 내려가지만 언젠가는 돌아와 낙엽아래 잠들리라. 살아서는 묻은 흙을 털어내지만 끝내 다시 돌아와 흙이 되리니”

세상 속에서 방종하던 추레한 내 영혼이지만 가을은 늘 숙연하게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떨구는 고개처럼 속절없이 지는 낙엽은 ‘핀 것은 지고 산 것은 죽는다.’는 천리를 되새김질하게 한다. 한정된 시간은 쉼 없이 흐르며 줄어들고 있는데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후회하지 않으며 떠날 수 있을까. 미소 지으며 눈감을 수 있을까.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다. 어떻게 살아야 그리 떠날 수 있을까! 고뇌할수록 결국 그 답은 현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의 선택도 할 수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준엄한 평가를 받아 판결되는 신의 처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를 회상한다. 다시 돌아가 잘못된 모든 것들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는 아직 남아 있는 세월을 지극하게 살아 평가를 바꾸는 것뿐이다. 생의 끝자락에서 섰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말들을 남겼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감사하라’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 는 등의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다. 죽음 앞에서 깨달았던 생의 가장 소중했던 가치와 진리는 전혀 새롭지 않은 진부함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부한 진리들이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이 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인생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정답이 없지만 가치 지향적 관점에서는 정답인 것이다. 사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고 관용하며 감사하는 일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모든 사람들이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이자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열쇠가 아니던가.

사랑하자. 마지막 순간이 오면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 않던가. 감사하자. 감사만이 삶을 긍정시키고 행복을 길어 올리리라. 관용하자. 내가 용서하면 신도 나의 잘못들을 용서하시리라. 시간을 아끼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루었던 건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았는가. 내 생의 시계바늘은 내일 혹은 몇 시간 뒤에 영원히 멈출지도 모르는데.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아른거린다. 가쁜 숨 몰아쉬며 발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스락대며 낙엽이 부서진다. 영원히 살듯 살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아가자. 시작이라는 말은 이미 끝을 내재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죽음을 외면하거나 제압하려 하지 말자. 삶을 완성하는 건 죽음이다. 죽음을 곁에 두면 현실에 충실하고, 처세에 현명해지며, 시간의 조각들은 고귀한 순간들의 연속이 되어 삶의 밀도는 높아질 것이다.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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