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극장 간판 그림의 代父… 포스터 ‘단’ 하나로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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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극장 간판 그림의 代父… 포스터 ‘단’ 하나로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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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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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간판 뿐 아닌 인테리어 공사
로고·심벌작업 등으로 수입 좋아
 
뮤지컬 배우 안유진 등 자식들도
내피 물려 받아 예체능계서 활동
평생을 그림만 그리며 살았지만
하고픈일 다하며 살아 후회 없어
작업 중인 안경모 화가.
동남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안경모(왼쪽)화가.
동남기원에서 작가 김동헌과 함께.

 

 

그림 인생 이야기 - 화가 안경모<하>



△ 수입이 좋았다. 돈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켰다

환등기를 사용한다든가 또 다른 기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많다. 처음에 그림 그렸을 때가 고등학교 2년 때, 공부하다가 극장에 조수로 들어갔다. 부산 초량에 대도극장에 조수로 들어 갔을 때가 1959년 사하라 태풍이 왔을 때다. 친구들 중에 극장 그림을 그리거나, 관공서 챠드사, 회사 도안사, 인테리어업, 간판점으로 가거나 무대그림도 연관성이 있어서 그리로도 많이 갔다. 나는 키가 작아서 군대는 가지 못했다. 아마 입대 했으면 군대에서 챠트 글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다방이나, 술집, 가게들 인테리어 공사도 하고 로고와 심벌 작업도 많이 했다.

당시 포항종합제철에서 행사가 있을 때, 다른 공간이 없을 때였으므로 주로 육거리 시공관을 빌려서 행사를 했는데 표창장도 주고 행사를 준비할 때 무대장치 그림도 그렸다. 그리고 효자 음악당(아트홀) 처음 생겨서 개관식 때 그림도 그렸다. 나는 단가가 많이 세서 함부로 부탁을 하지못했다. 그 당시 월급을 비교해 보면 안다. 금방 알 수 있다.

포항종합제철 직원들 월급이 2만원 일 때, 내가 월급으로 10만원을 받았다. 수입이 짭짤했다. 힘들게 배웠지만, 수입이 좋았다. 돈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켰다.

딸이 넷, 아들 하나다. 모두 출가하고 막내만 남았다. 막내는 나이가 31세인데, 서울에서 연예계 매니저로 근무한다. 큰딸은 그림을 그리고 있고, 둘째는 뮤지컬 배우 안유진이다. 서울 대학로에서 중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검색해 보면 나올 것이다. 자녀들도 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내 피를 이어받았는가 보다.



△ 어쩌다 아내를 만났고, 그리고 아내는 10년 전에 사별

어쩌다가 보니까 아내를 만났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 고향은 영덕 끝자락 백석이 고향인데 우리집 옆에 사는 사람이 집사람 친척 언니였는데 중매를 해서 결혼하게 되었다. 나와 나이가 10년 정도 차이가 났으니까, 결혼하고 처음엔 고생도 많이 했다. 못 살아서 보험설계사로 근무도 하고 고생도 많이 했다. 처음에 내가 백석에 가서 직접 만났다.

만나자 마자 바로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경주 대왕예식장에서 했다. 왜냐면 경주에 있는 대왕극장, 아카데미극장, 경주극장에서 일을 했을 때니까 1972년도에 경주에 살다가 포항으로 이사를 왔다. 그 당시만해도 포항의 극장 규모도 훨씬 컸다. 포항에 극장이 5개, 오천극장, 흥해에도 극장이 있었다. 그 극장에서도 모두 그림을 그렸다.

포항에는 내하고 최항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 제자인데, 포항시민극장에 취직을 시켰다. 김성찬이라는 분이 포항아카데미 극장 주인이었고, 포항시민극장, 국제극장, 대신극장 주인은 이상일씨 였다. 한 사람이 다 맡아서 했다. 당시 극장주는 부자였다. 거부고 유지다. 그 당시 황대봉씨 같은 분을 여기에 따라 올 수도 없었다. 김성찬씨는 사업가였다.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쌀 장사를 하다가 극장 사업을 하게 되었다. 아카데미극장의 역사는 50년이 넘을 것이다.



△ 아이들 잘되고 막내 결혼이나 시키면 되는 거지 뭐!

지금하고 싶은 일은 없다. 뭘하려고 해도 체력이 따라 주지 않는다.

이래 살다가 내 나이가 78세인데, 가는 거지 뭐! 소원은 아이들 잘되고 막내 결혼이나 시키면 되는 거지 뭐! 뭐 지금처럼 편안하게 사는 것이지 뭐! 자화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손가락도 아프고 힘도 딸려서 못그리시겠다고 한다. 직업병으로 손가락이 불편하다. 필력이 좋으시다. 사인들 해 달라고 하시니 역시 다르다. 필체가 아주 훌륭하시다. 요즘같았으면 간판 그림을 그리고 나서 사인도 남길 법 한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3일 내지 4일 마다 프로가 바뀐다. 일주일에 2편 상영하면, 월~수, 목~일 그림을 그린다.

물론 좋은 영화는 한 달간, 일주일 혹은 보름간 상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자주 바뀐다. 그래서 정말 간판 그림을 많이 그렸다. 하루 만에 다 그렸다. 심지어 소극장 그림은 하루에 3프로 정도를 그리기도 했다.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극장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가령 내일 영화를 상영해야된다고 한다면, 그림 마감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다. 밤샘 작업도 하고 며칠 만에 완성하기도 하고 그랬지 뭐! 특히 명절 대목은 더 바쁘게 돌아갔지, 특선 대작이니까 더욱 신경써서 잘 그려야 하니까 다른 직원들보다 대우가 좋은 편이다. 당시 아카데미극장에는 직원이 10명이 넘었다. 매표 2, 표 받는 사람 2, 영사실 3, 청소 1, 그림 1, 매점은 대여를 했고, 포스터 선전원 1~2명, 총무 1명이었다. 직원들이 전부 퇴직금도 못 받았다. 개인 기업체니까 장부도 하나 없었다. 홍보수단은 주로 포스터를 각 점포나 담장에 붙이고, 라디오 광고, 상가 유리창문에 붙이면 50% 할인권, 초대권을 준다. 간혹 장소가 좋은 상가는 초대권을 주기도 했다. 시내에 최하 300곳 이상에 포스터를 붙였다. 혼자서는 다 붙일 수가 없다.

영화 관람비용은 1970년대 90~95원 정도 했다.나중에 몇 100원에서 1000원까지 갔다. 마지막에 내가 끝날 때쯤에는 6500원 정도 했다. 1970년대 커피 값이 50원이었다. 택시비와 버스비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평생 그림만 그렸다

내가 공부를 했더라면 더 잘 되었을 것이다. 나이 80이 다 되어서 내 꼬라지가 이러니, 그러나 후회는 없다.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은 다 해 봤으니까, 그림이 좋아서 했다기 보다는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던 시대 였으니까, 뭐 어쩔 수 없었지.

그림으로 살아 왔는데, 뭐 다른 것을 하려고 해도 재주가 없으니까 뭐 할 수 없었지. 그런 방면이 아니고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미술반이 그 시작이었지 뭐, 극장에 들어가는 것도 취미가 있으니까, 조수로 취직을 해서 연마를 하고 배워서 극장 간판쟁이가 된 것이지 뭐! 가장 큰 포인트는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가 어떻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기에 포스터 하나로 승부해야 한다.

포항MBC 영일만 사람들에 출연한 적도 있다. 백단장이라고 백진기 단장이 MC를 할 때 내가 나왔지. KBS에서도 나왔는데, 한 가지 직업을 오래 하다 보니까 방송에도 출연하게 된 것이지 꽤 오래도록 한 장수 프로였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경북이라는 책자에도 여러 번 인터뷰 했다. 신문에도 나왔다. 그런데 라디오는 안 나왔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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