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덕 영화계와 인연… 인생 참 영화같지예” 
  • 경북도민일보
“지갑 덕 영화계와 인연… 인생 참 영화같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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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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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넘겨가며 지갑 주인 찾아줘
이상재·이상일씨와 인연 시작
고맙다며 소원 들어준다는 말에
시민극장 매점 운영권 달라 간청
몇개월 후 대신극장 매니저 근무
2000년 영화 ‘챔피언’마지막으로
포항극장 인생 마침표… 세대 교체
김화술 대표
당시 포항극장 앞 모습.
포항극장계의 대부 이상일 회장 부인 송정식 여사와 함께.
포항극장을 매각하고 나서 이상일회장 자녀들과 기념촬영.
포항극장계의 산증인 김화술<하>

△해를 넘겨 가며 찾아 준 지갑이, 평생 직장의 길로

그 때부터 포항 시내를 두루두루 담배장사를 다니면서 그 지갑 주인을 직접 찾아주겠다고 지갑을 갖고 다니면서 그 사진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했지.

1958년 여름에 지갑을 주었지만 집에도 비밀로 한 채 지갑주인 찾아주기는 해를 넘겨 1959년이 되어도 계속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설 대목이 지나고 2월인가 아침에 시민극장 앞 2층 양지다실에 담배를 팔러 갔는데 아 딱 그 사진속의 주인공 남자가 그 자리에 딱 있는 거야!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지 뭐야? 어쨌든 지갑을 그때 일행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그 사진 속 인물 앞에 지갑을 내밀며 “아저씨요! 이 지갑 아저씨꺼지예?”

그 순간 그 주인공은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갑을 낚아채더니 지갑을 열어 돈을 확인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는 거야.

그 지갑의 주인은 바로 나를 포항의 극장계로 이끈 이상재씨였고 그때 시민극장과 포항극장을 운영하던 이상일씨의 사촌동생이었지. 영일중학교 체육선생을 하다가 형님 부탁받고 선생 그만두고 포항극장의 총괄 매니저 총무일 지배인을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지갑속 거금은 서울 영화사에 가서 필름을 사오는 영화대금이었던 거지.

“형님 돈 12만원으로 세기영화사 부금(영화필름공급비) 갖다 줄라고 보겟토에 넣었다가 송도에서 잃어버렸는데 그동안 사는 게 사는기 아인기라” 사촌형님한테 얼마나 뚜디리 맞았는지 아나? 자네가 내 도둑누명 다 빗기 줬다.

그러니 난리가 났고 이상일씨 한테 의심도 받고 결국 자기 돈으로 돈을 빌려 갚아가고 있었는데 내가 이 지갑을 찾아주니 누명도 벗고 명예도 찾게 해줘 은인 같았던 거지.

그날 아침 양지다실에서 쌍화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그 지갑을 줍고 찾아다닌 사연을 다 들은 이상재씨는 “요즘 같은 세상에도 학생 같은 사람이 있나 내, 니 소원 한 가지는 들어줄게 이야기 해봐라”고 하더라고요.



△아침마다 시내 중심가 시민극장 앞으로 담배 두 갑 대령

그래서 그 땐 담배 팔러 다니는 게 내 일이었으니 대뜸 “아저씨요 나는 담배만 하루에 한 갑씩 팔아주면 되니더”라고 말했고 그는 “오냐 그라마 내가 시민극장에 매일 나오니 아침마다 이 극장 앞으로 담배 두 갑씩 가온나”

1959년 2월 그날 아침을 지금도 잊을 수 없지요. 6개월 이상 갖고 다니던 지갑의 주인도 찾아줬고 담배단골도 생겼거든. 그날부터 아는 담배를 팔러 내일 이상재씨를 만나러 극장으로 가기 시작했어. 그 후 양담배를 팔러 다니는 내 일에도 큰 위기가 닥쳤지. 그때 동지중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한참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때인데 5·16혁명 일어나고 양담배 판매금지 조치가 내리니 밥줄이 끊길 판이었다.

먹고살길이 막혀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 니 소원 한 가지는 들어줄게” 하던 이상재씨 말이 퍼뜩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찾아가서 그때 시민극장 매점 운영권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극장매점은 극장주인이 직접 하거니 친척이 독점하고 있어서 택도 없는 소리인데도 대뜸 그렇게 말해버렸지. 그 다음부터는 자기지갑을 찾아준 학생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이상재씨와 극장주인인 사촌형님 이상일씨와의 지루한 다툼이 시작되었어요. 사실 노란자위로 알려진 극장매점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줄리 만무해 이상일씨의 반대는 완강했거든요.

그래도 약속을 지키려고 “형님 나 인자 극장일 다 때리 치울랍니다”하며 자기 밥줄까지 내걸고 강력하게 설득한 이상재씨 덕분에 몇 개월 후 나는 형님과 우리 집 전 재산인 논 10마지기 판돈을 마련해 결국 시민극장 매점을 맡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민극장 매점운영권 따내며 이상일 회장과 인연

그렇게 1962년 시민극장 매점을 시작하면서 그 후로 30여년동안 극장일을 하도록 해준 이상일 회장님과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매점일 을 한 1년 정도 했을까 이 회장님은 새로 문을 연 대신극장 매니저가 야반도주하자 나보고 대신극장 관리를 맡으라고 했어요. 그 뒤로 또 죽도극장을 인수하면서 나보고 수금과 총무일을 맡기시더니 나중에는 포항시민극장 일도 보게 되었죠.

그러던 사이에 스물두 살 어린나이인데 회장 사모님이 중신을 섰어요. 다름 아니라 같은 극장(시민극장)에서 경리를 하던 동갑내기 이부전양 인데 지금은 안사람이 되었다. 그리 만나 알콩달콩 살다가 1남3녀를 낳아 다 출가시키고 잘 살고 있다.

그렇게 이 회장은 장가도 보내주고 돈 관리도 맡기고 사람 됨됨이를 살펴보시더니 시민극장 포항극장 대신극장 죽도극장 등 공과금이나 대외활동 등 총괄일을 극장 일을 믿고 맡겨 주면서 이 회장님은 아버지처럼 잘 해주셨지요.

그 후로 38년 동안 극장밥을 먹으며 포항 영화계 주변에는 참 많은 스토리가 있었지요. 사울에 충무로가 있다면 포항은 단연 중앙상가를 중심으로 극장문화가 싹트고 퍼져갔죠. 1980년 민주화의 봄이 닥치면서 지역 극장계에도 많은 소용돌이가 몰아쳤어요.

연극인들 중심으로 좌석수 200석이하의 ‘소극장’ 허가요구가 비등해지자 정부가 마침내 1983년 소극장 허가를 풀어주니 이 좁은 포항바닥에도 앞 다투어 극장들이 생겨났어요.



△민주화 바람타고 1980년대 초 포항에도 소극장 바람 불어

포항에서 가장 먼저 생긴 소극장은 우체국에서 포항역으로 올라가던 길 골목 ‘가고파극장’이었고 울릉도트위스트를 작곡한 유명 작곡가 황우루씨가 무궁화백화점 3층을 얻어 청춘극장을 열고 돈 좀벌어 그 옆에 예술극장을 개업했는데 한참 뒤에 황씨는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또 죽도시장옆 지하에 대구사람이 하는 ‘죽도소극장’이 들어섰고 오거리에 ‘한일극장’ 조흥은행위 강치과자리에 ‘피카디리극장’, 그리고 포항극장위에 ‘중앙소극장’과 그 뒤에 생긴 ‘명보극장’, ‘대흥극장’을 포함해 한때 소극장만 9개가 포항에서 성업 했답니다. 그때 경주는 신라 대왕 아카데미 경주 등 4개의 극장이 들어섰고요.



△TV드라마 ‘여로’ 때문에 극장가 위기 맞아

극장의 위기도 여러번 있었지요.

TV드라마 여로를 할때였는데요. 1972년쯤인가 장욱제와 태현실이 나오고 처녀였던 박주아의 시어어니 역할이 얼마나 인기였던지 저녁 8시쯤만 되면 모두 여로 보러간다고 집에 들어가는 바람에 극장에 한때 된서리를 맞았지. 그때 흑백 테레비가 10만원이 넘었는데도 많이 팔리나갔거든.

당시 시내 빅3 극장은 시민극장 1100석, 아카데미 850석, 포항극장 830석 순인데 60년대에는 나훈아 남진 남일해 안다선 현인으로 이어지는 ‘쑈’가 한달에 한 두번씩 시민극장과 아카데미극장에서 열렸는데 가수매니저들이 극장부터 잡으려고 극장 영업부장한테 로비도 많았어요.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부터 쑈 대신 리사이틀 형태가 많았는데 춘천출신 김추자도 단연 인기를 끌었고 서울쇼, 낙랑쇼도 잘나갔어. 한번은 시민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할땐데 1100석 정원에 2500명이나 입장한 적이 있었지. 요즘 같으면 안전문제로 큰일 날일인데 그때는 서서라도 스타얼굴을 보겠다는 거야. 가수들이 오면 잠은 주로 아카데미 극장앞 제일여관이나 금아여관에 자고 갔어요.

포항극장가의 큰 이야기거리는 사실 포항을 배경으로 한 첫 영화 ‘형제’입니다.

이 영화는 제가 극장계에 몸담기 전의 일이라 상세히는 모르지만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흥미진진하더라고요.



△톱스타 최은희 주연의 ‘형제’ 포항에서 장기간 촬영

당대 톱스타 최은희 주연의 이 영화는 1958년, 가장 큰 영화관 시민극장에서 3주간 상영돼 3000여명이 영화를 봤는데 당시 인구 6만명으로서는 흥행에 성공했어요.

그해 포항에서 영화가 상영될 때는 포항 곳곳에 ‘포항을 배경으로한 첫 현대감각의 영화 개봉박두’등의 현수막이 내걸렸어요.

바다를 배경으로 밀수와 밀항이 얼키며 형제간의 끈끈한 애증을 다룬 작품인데 영화 촬영을 위해 배우들과 촬영팀은 1957년 가을부터 1958년 봄까지 6개월 동안 포항에 머물며 현지 올 로케이션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해요. 청하와 대보(호미곶) 구룡포 등 멋진 포항해변을 배경으로 주로 촬영되었는데 요즘 같으면 관광 홍보하기에 좋을 기라요.

이 때만해도 최은희가 ‘새마을다방’에 나타나면 당대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와 눈빛이라도 한번 맞춰보기 위해 사람들이 한꺼번에 위해 몰리는 바람에 골목이 터져나갔다고 합디다.

1980년대부터는 이상일회장님이 직접 경영하시던 시민극장과 포항극장을 어느 날 나보고 맡으라고 하셔서 매달 세를 드리고 두 극장을 얼떨결에 맡게 됐어요. 그러면서 문 닫을 위기가 온 소극장 몇곳도 인수하고 하면서 한때는 소극장을 포함해서 5개 극장을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민극장은 1993년, 이 회장이 돌아가실때 2세에게 넘겨드렸는데 IMF때 직격탄을 맞아 1999년쯤 문을 닫고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죠.



△포항극장 내놓은 지 10년 만에 주인 나타나

그래도 포항극장은 제가 주욱 관리를 해왔는데 이회장님이 돌아가시고 자녀들이 극장을 팔아달라고 해도 워낙 매물이 커서 10년이 지나도 팔릴 기미가 안보였는데 드디어 2000년에 임자가 나타났어요.

포항문화방송이 멀티영화관 사업을 한다고 매입의사를 전해와 결국 평당 800여만원씩 60여억원을 받고 팔아서 이회장님 사모님과 가족에게 드렸죠. 원래 포항문화방송에서는 새 사업으로 영화관을 하기로 해놓고 그 부지로 옛날 청룡회관 맞은편 국제나이트클럽 자리를 눈여겨봤던 모양인데 결국 중앙상가 입구에 위치해 있고 포항의 첫 영화관이라는 역사성이 있어 포항극장 자리로 최종 낙점된 것 같애.

2000년 8월30일에 포항극장이 간판을 내리면서 저의 임무도, 극장인생도 막을 내렸는데 그 마지막 영화가 지금도 잊지 못할 ‘챔피언’입니다. 링에서 희생된 복서 김득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인데 유호성이가 주연이었죠. 막판에 인기가 좋아 MBC에 양해까지 구하며 한 달 (상영)할 기간을 한달반으로 늘려 2만3000명이 다녀갔지요.

그렇게 포항극장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서 대형 복합상영관 신축이 시작돼 2003년 4월, 새로운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포항극장의 한세대가 교체하게 된 거지.

포항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화를 되짚어보면 포항극장에서 5만명 동원한 ‘쉬리’와 이연걸 주연의 1990년작품 ‘정무문’인데 이때는 피카디리와 예술극장등 소극장과 동시상영을 했는데 하루 7000명이나 들어와 그 열기로 극장 천장이 내려앉는 줄알았어. 그리고 성룡주연의 ‘취권’도 포항극장에서 3만명을 모았고 국산영화로는 70년대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한번’이 대히트였지. 1편 2편 3편 횟수를 늘려가면서 관객이 늘어나 결국 4편대신 ‘대완결편’까지 나왔어.

포항의 극장도 이제 한 시대가 갔지요. 포항은 해병대와 종합제철이 들어오면서 타지 사람들이 유입돼 극장이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어요. 그래서 담배팔이 하던 나에게 극장을 통해 꿈을 이루게 해준 곳이고.

허허~ 인생이 영화 한편 같아요. 동시상영도 아니고 단편 영화말이요. <끝>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포항 중앙상가에서 이한웅 작가와 인터뷰 중인 김화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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