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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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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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도시를 넘어 친환경 녹색도시로 탈바꿈한 포항
포항의 도심공원 센트럴 그린웨이 전경. 사진은 지난 5월 벚꽃이 활짝 핀 철길 숲을 드론으로 촬영한 것이다.
포항의 도심공원 센트럴 그린웨이 전경.
포항의 도심공원 센트럴 그린웨이 전경.
포항의 도심공원 센트럴 그린웨이 전경.

과거 포항의 철도는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조선시대 최초로 기차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은 후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기수는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된다. 그는 ‘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당시 기차와의 첫 대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 차의 불 바퀴가 한 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구르게 되는데 천둥 번개처럼 달리고 비바람처럼 날뛰어 순식간에 움직인다. 창문으로 보이는 좌우의 산천, 초목, 집, 사람들이 보이기는 하나, 앞뒤에서 번쩍번쩍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다. 담배 한 대 피우는 동안 신교(新橋)에 도착하니, 순식간에 90리 길을 온 것이다.”그의 눈에 비친 기차는 시커멓고 험상궂게 생겼으며 불 바퀴를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탈것 이었다. 조선에서 매일 이용했던 가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기계문명을 처음 접한 조선 관료의 충격적 경험이 있은 후 23년 뒤 조선에서도 처음으로 기차가 등장하게 된다. 경성사람들은 기차를“쇠 당나귀”라 부르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만져보기도 하고 짓궂게 회초리로 내리치는가 하면 돌을 던져보기도 하였다. 당시 기차는 누구나 쉽게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경성에서 인천까지 가려면 닭 세 마리 값과 맘먹는 요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육당 최남선도 조선에 기차가 들어 온지 32년이 지나서야 난생처음 경부선을 타게 되는데 그 감화를 이렇게 글로 남겼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가진 새라도 못 따라오겠네...”라며 속도를 애찬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전국으로 철도가 연결되고 대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이름조차 생소했던 어촌이 철도가 개통되면서 신흥도시로 급부상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포항이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한지 불과 19년 만에 포항에도 처음으로 기차가 들어오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포항의 철도개통을 우선순위에 둔 이유는 지경학적으로 대구·경북과 강원도까지 수탈지역으로 설정하면서 그 집산지로 주목한 곳이 포항이다. 비록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큰 항구로 개발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했고 여기에 수산자원까지 풍부해서 철도와 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유출하기 가장 적합한 곳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919년 포항의 학산역은 그런 이유로 생겨난 역이다. 조선총독부는 현재의 롯데백화점과 해양항만청 일대에 학산역을 설치하고 항구까지 연결하는 임해철도를 건설해 수탈물자를 손쉽게 일본으로 운송하려 하였다.

철도 개통은 작은 어촌을 순식간에 경북 제1도시로 성장시킨 반만 한편으로는 지역 중산층의 입지를 좁혀 빈민을 급속히 늘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포항의 농업, 상업, 수산업, 임업, 금융업 등은 일본인 자본에 의해 대부분이 잠식되었다. 당시 언론기사에 의하면 포항역을 통해 만주로 떠난 사람이 불과 한 달 만에 475명이나 되었다.(동아일보, 1935년3월21일) 그 다음해에는“급격한 농촌경제의 몰락으로 생의 도태를 당한 유리군(流離群) 천명이 1월부터 5월까지 포항역에서 만주로 떠났다.”(동아일보 1936년6월11일) 일제강점기 포항의 철도는 수탈과 배 고품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픔의 역사다.

해방이후 포항의 철도는 청룡부대가 월남파병을 위해 떠나던 출발지이다. 당시 해병대1사단에 집결해 훈련을 마친 후 포항역을 통해 부산항으로 출발했는데 당시 포항역은 아들, 남편, 손자를 전쟁터로 떠나보내며 통곡을 했던 장소다. 1960년대 포스코가 들어서자 포항의 철도는 다시 한 번 도시의 변화를 가져 온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도시는 급속도로 발전과 확장을 거듭하게 된다. 전국최초로 기업전용 통근 열차가 운행되었고, 1992년 새마을호가 운행되면서 포항과 서울은 철도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서울이 가까워지자 이용객은 점점 늘어나 2002년 1일 2회 왕복운행하게 되었다.

2015년 4월 1일 오후 9시 35분 무궁화호 7566편을 마지막으로 대흥동 포항역이 100년 역사를 마감하였다. 포항의 근현대사 100년을 오롯이 품었던 포항역 철도가 재활용성이 부여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센트럴 그린웨이(Central Green Way)로 이름 붙여진 이곳 공원이 도시디자인 차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와 개장 후 드러난 문제점을 집어보고자 한다.



세계의 유명 도심산책로와 비교한 포항의 센트럴 그린웨이에 대한 평가

포항은 도시의 형태가 해안선을 따라 길게 형성되면서 공간 활용성이 타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도시의 형태는 오이처럼 길쭉한 모양보다는 사과나 계란처럼 타원 또는 둥근 모양을 띨수록 공간 활용측면에서 더 효율성을 띠기 때문이다. 여기다 철도가 도심을 관통하면서 도시중앙을 죽은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자 가뜩이나 공간 활용성이 떨어진 도시를 형태마저 못생긴 도시로 만들어 왔다. 한때 철도와 교통시설이 도시의 핏줄이라 하여 이들 수단이 모든 것의 중심에 놓였던 시대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도시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에는 한때 도심을 가로지르던 철도가 그 역할을 마감하며 오랜 기간 버려졌던 철길을 도심공원으로 다시 디자인해 세계적인 명소로 탄생시킨 사례가 있다. 바로 세계 최초의 하늘공원인 프롬나드플랑테(Promenade plant.e)이다.

프롬나드플랑테는 식물을 심은 산책로(Planted Promenade)라는 뜻이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건설된 이 철도는 바스티유역에서 생 마우르(Saint Maur)역까지 파리 남서쪽 14㎞를 연결하는 철길이다.

1969년부터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993년 고가철길에 가로수를 심어 도심 속 산책로로 조성하였다. 고가의 철길은 노후화가 심해 한때 철거될 위기에 놓였지만


건축가 패트릭 베게르(Patrick Berger)와 재민 갈리아노(Jamine Galiano)에 의해 보행육교상가로 재탄생하였다. 총길이가 1.5㎞에 달하는 이 구간에는 적벽돌로 건설된 70개의 아치를 다시 복원하고 각각의 아치공간에는 공예품가게, 갤러리, 가구점, 레스토랑, 카페 등을 입점 시켜 프랑스의 문화특성과 정서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관광명소로 평가되고 있다.

프롬나드플랑테는 철길 자체만 활용한 까닭에 공간이 협소한 구간이 대부분이다.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수목이 식재되었고 좁지만 수변공간도 설치되어 있어 쉼 없이 걷기에는 적당한 관상용 산책로에 가깝다.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뉴욕의 하이라인파크다. 하이라인파크 또한 대부분의 구간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고가철도에 휴식과 산책을 겸할 수 있도록 조경하였다. 프롬나드플랑테의 단점을 보안해 하이라인파크가 조성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수목을 활용한 조경보다는 산책과 편의성만 강조되어 디자인되었다는 점에서는 공원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로7017은 하이라인파크를 닮은듯하나 철길이 아닌 고가도로를 이용해 산책로를 조성했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도심의 고가공원으로서 산책로로서 갖춰야할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은 물론 본래의 기능성마저 발휘할 수 없다면 의미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포항의 센트럴 그린웨이는 포항역사가 KTX 신역사로 옮겨가면서 사용하지 않는 철길과 주변의 유휴지를 활용해 조성한 도심공원이다. 그동안 도심에 제대로 된 공원하나 없던 삭막한 산업도시의 삶을 정서적 안정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제대로 디자인된 공원은 웬만한 산업시설 10개보다 더 훌륭한 가치를 재생산 한다. 뉴욕의 시민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센트럴파크다. 자유의 여신상도 높은 빌딩 숲도 센트럴파크에서 즐기는 짧은 점심시간보다 만족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센트럴 그린웨이는 총 12만㎡에 달하는 폐철도 부지를 이용해 구간마다 장소성에 걸 맞는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산책로 곳곳에는 예술작품이 설치되어 있어 작품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는 가장 안정된 도심공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광장에는 음악분수대를 설치하였고 넓은 길과 오솔길을 적당한 거리마다 조성해 자칫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산책로의 단조로움을 찾을 수 없다. 유럽의 명품 산책로인 프롬나드플랑테와 세계적인 도시디자인 사례로 꼽는 뉴욕 하이라인파크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산책중심, 관상중심, 기능중심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센트럴 그린웨이는 이 모두를 보완하면서도 예술적 가치를 더해 정서적 안정감까지 느끼게 하는 도심공원의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현대 도시의 삶에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공원이다. 오래전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리는 자연의 품속에 안겨서야 비로소 정서적 안정을 되찾기 때문이다.



프롬나드플랑테의 장점으로 본 센트럴 그린웨이의 단점

외부의 시선으로 본다면 포항은 과거가 없는 도시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와 현대문화물만 남아 있을 뿐 근대기가 문화물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센트럴 그린웨이는 철도를 걷어 내고 조성한 도심공원이다. 군데군데 몇 가락 남겨놓은 작은 흔적마저 발견할 수 없다면 이곳에 대한 기억은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다. 지난 100여년 우리의 일상사를 오롯이 간직했던 포항역이 경솔한 판단으로 사라졌다. 우리를 아프게 했던 것과 자랑스럽지 않는 것도 모두 우리역사다.

유럽의 역사는 보존의 역사다. 파리의 센 강 주변에는 오래된 건축물이 그 도시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기도 힘들지만 오래된 건축물을 허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래된 문화물일수록 보수를 거쳐 보존하는 것이 이들에겐 상식이기 때문이다. 프롬나드플랑테를 디자인 하면서 오래된 고가철로를 다시 수리해 명소로 만든 사례는 센트럴 그린웨이는 교훈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도시가 가진 흔적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설사 이것이 보여주고 싶지 않거나 추한 것일지언정 미래세대에게 중요한 역사적 자산으로 기억되어 그들의 삶을 떳떳하게 하고 도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역사문화물이 많은 도시가 도시의 품격을 높인다.

아직 늦지 않았다. 포항역을 다시 복원해 “포항일상사박물관”으로 활용한다면 뜻 깊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각 가정에서 잠들고 있는 소중한 역사자료를 발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고 나아가 한곳에 보관되어 전시함으로써 후대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도심공원을 산책하다 이곳을 들릴 수 있다면 과거의 장소성을 되새기는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센트럴 그린웨이의 조성의미를 더 깊게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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