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심판', 역사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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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심판', 역사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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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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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와인 세일을 하길래 호주 티렐 와인(Tyrell’s wine)을 한 병 샀다.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어려움을 겪는 호주 와인 농가를 돕는 운동에 나도 동참했다. 집콕 와인으로 코로나 블루도 날릴 겸….’

언론사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중국문제 전문가인 페이스북 친구가 얼마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티렐 와인 사진과 함께 올린 게시물 글이다. 100자도 되지 않는 이 짧은 글에 20여개의 응원 댓글이 달렸다. ‘호주 와인 맛있다’, ‘나도 호주 와인을 구매해야겠다’, ‘잘하셨다….

호주 와인을 구매하자는 게시물을 올린 건 이 페이스북 친구가 처음은 아니었다. 내 눈에 띈 것만 최소 서너 건은 된다. 호주 와인 구매 운동은 현재 SNS에서 조용히 확산중이다.

이 게시물을 읽고서 나도 다음에 와인을 살 때 호주 와인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호주 와인에 호감을 가져왔다. ‘옐로우 테일’이라는 캥거루 디자인의 호주 와인을 몇 번 마셨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 와인이 본격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88서울올림픽 이후인 1990년대 들어서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고 세계화가 급속히 추진되면서 와인에 대한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한국 기업의 위상이 높아지고 국제 비즈니스 미팅이 빈번해짐에 따라 와인 매너 역시 그에 비례해 중요해졌다.

세계 공통어는 영어지만 세계 문화의 공통어는 와인이라는 통념이 확산하였다. 와인 전문서들이 속속 출간되면서 와인 전문가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출현했다. 급기야 서울와인스쿨 같은 와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으레, 식사 모임에 초대받으면 와인 한 병씩 들고 가는 게 매너로 자리 잡았고, 와인을 곁들인 식사 자리에서 와인에 대해 몇 마디를 하지 못하면 대화에 끼기 힘들었다. “프랑스 그랑 크뤼급 와인은~~~”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의 차이는~~~” “프랑스 와인의 명가 로칠드 가문은~~~” 어떤 사람이 식사 자리에서 프랑스 와인의 라벨을 보고 와인의 등급을 구분하고 행간에 담긴 스토리를 끄집어내 이야기를 풀어가면 그는 감탄의 대상이 된다.

보르도 메독 지방에 있는 ‘샤토 무통 로칠드’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와인 종주국은 어디?

1970년대 초반, 유럽 대도시 와인숍에 가면 판매 중인 와인의 90% 이상이 프랑스 와인이었다. 독일·스페인·이탈리아·포르투갈 와인은 한쪽 구석에 구색 맞추기 용으로 몇 병 갖다 놓는 수준이었다. 마치 프랑스가 와인의 종주국이나 되는 것처럼 세계인은 프랑스 와인만을 숭배했다. 와인 하면 곧 프랑스였다.

와인을 가장 먼저 만들어 마신 나라는 어디일까. 이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와인은 인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한다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성경에서는 모두 다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곳에서 와인(포도주)이 등장한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마셨다(창세기)’,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神) 디오니서스는 최초로 인류에게 와인 담그는 법을 가르쳤다. 호머의 ‘오디세이아’에도 와인이 나온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동굴에 갇힌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괴물 키플로프스를 물리치는 데 사용하는 게 와인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의 기록에도 와인이 나오고, 고대 이집트에서도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마셨다.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와인에 물을 섞는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로 와인 산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와인은 주로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마셔온 술이다. 지중해를 둘러싼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을 2000년동안 지배한 것은 로마제국이었다. 로마인들은 와인의 제조·보관·유통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다. 와인이 로마제국의 주요 수출품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이와 함께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프랑스, 스페인, 독일 남부에 포도재배가 시작되었다. 지중해 주변과 중동 지역에 한정되어 있던 와인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킨 것은 로마제국이다. 굳이 와인 종주국을 찾자고 한다면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해체되면서 와인 산업도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와인은 수도원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왔을 뿐.



△파스퇴르와 프랑스 와인


그렇다면 프랑스는 언제부터 와인 종주국의 타이틀을 로마로부터 넘겨받아 오랜 세월 와인 명가(名家)로 군림하게 되었을까. 이 지점에서 한 과학자가 등장한다. 한국인에게 파스퇴르 저온살균 우유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겸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

릴레대학교의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는 1856년 와인 제조업자들로부터 와인이 금방 상해버리는 원인을 규명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와인 제조업자들은 와인이 쉬어버리는 원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미생물과 발효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860년 ‘미생물에 의해 발효와 산패(酸敗)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와인 제조법에 대혁신이 일어났다. 햇빛이 물과 결합해 만들어지는 게 와인이지만 그것을 안정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다. 파스퇴르의 발견으로 프랑스는 와인 명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프랑스 과학에서 파스퇴르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파스퇴르는 광견병·탄저 백신을 개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파스퇴르 연구소는 세계적 의학연구소다. 연구소에서 5분 거리에 파스퇴르 대로가 있고, 그 도로에 파스퇴르 지하철역이 있다. 파스퇴르가 살던 아파트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연구소 외벽에는 파스퇴르의 업적을 기리는 명판을 붙여놓았다.

1976년 5월, 파리 근교에서 와인 블라인드 평가회(Blind-Tasting)가 열린다. 프랑스인 9명, 영국인 1명, 미국인 1명 총 11명의 와인 전문가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섰다. 이날 블라인드 평가회에는 화이트 와인 10종(프랑스 4종, 캘리포니아 6종), 레드 와인 10종(프랑스 4종, 캘리포니아 6종)이 출품되었다. 그전까지 치러진 블라인드 평가회에서는 언제나 프랑스 와인이 1등을 차지해왔다.

파리에서 와인숍을 운영하는 영국인 와인상(商) 스티븐 스퍼리어는 세계가 주목할만한 새로운 와인을 찾아 나선다. 다른 와인상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새 와인을 발굴해 돈을 벌고 싶었다. 스퍼리어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여러 와이너리를 돌며 와인을 시음했다. 그중에서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1973년산을 골라 파리 평가회에 내놓기로 한다. 스퍼리어는 나파 밸리의 포토 재배법이 전위적이라는 사실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 누구도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이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평가회에 나갈 와인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했다.

판정 결과는 화이트 와인 1등은 캘리포니아 ‘샤토 몬텔레나 1973년산’, 레드 와인 1등 역시 캘리포니아 ‘스태그스 리프 와인’이었다. 레드 와인 2등은 프랑스의 대표적 와인 명가 ‘샤토 무통 로칠드’였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와인 전문주간지 ‘와인 스펙테이터’는 1면 머리기사로 이 뉴스를 보도했다.

‘California Wines Top French at Paris Blind-Tasting wine event’

프랑스 와인 제조업자들과 프랑스 와인을 거래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누구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꿈에서도 생각지 않았다.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 기념으로 다시 블라인드 평가회가 열렸다. 이 평가회는 세계 와인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캘리포니아 와인의 승리였다.

2006년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법안(#ACR-153)을 채택해 공식적으로 1976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공표하기에 이른다. 미국 워싱턴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파리의 심판’의 두 주인공인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한 병과 스태그스 리프 카베르네 한 병이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 중이다.

2008년에 나온 영화 ‘와인 미라클(원제 Bottle Shock)’은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의 아성을 꺾고 우승을 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파리의 심판’을 분기점으로 세계 와인 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영화에서 주인공 스퍼리어는 기적을 이뤄낸 뒤 혼잣말처럼 말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미신을 깨부쉈어. 프랑스 와인이 최고라는 미신을. 전 세계의 눈을 뜨게 한 거야. 남미의 와인도, 호주와 뉴질랜드 와인도, 아프리카 와인도···.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의 독백을 듣고 있는데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한 문장이 번쩍스쳤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이름 주위로 몰려드는 오랜 오해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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