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쓸모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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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쓸모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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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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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은의 사적인 LP

데미안 라이스의 ‘O’를 들으며



- 끼어들 수 없는 무드

그런 날들을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럭비공처럼 어디로든 튀어 오르는 나날이었고, 하루하루를 대책 없이 보내는 이십 대의 끝자락이었다. 나는 기타 강습소에서 기초반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학원 선생님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심화반 선생님인 D와 S는 이제 막 졸업을 앞둔 경영대 학생들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밝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뭐랄까, 처음 본 생물을 대하듯 했다.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는데, 아무래도 셋 모두 기타를 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합주실에 모여 펜타토닉 스케일을 연주하기도 했고, 오아시스나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부르며 이십 대의 패기를 불태웠다. 그러다 누군가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를 부르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엄숙해졌다. 쌀 아저씨(데미안 라이스의 별칭)의 무드는 대단했다.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 Two become One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지 않겠냐는 동생들의 걱정에 나는 유망한 소설가가 될 몸이니 사인이나 받아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돌아서면 두렵기 짝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도 그런 나의 호기로움은 내 것이 아닌 양 낯설다. 나는 정말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소설가가 되고 싶은지는 두루뭉술했던 것 같다. 그래서 두루뭉술한 작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나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도 잘한 일들은 분명히 있다. 나는 두 동생을 이끌고, ‘Two Become One’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 두 곡을 마치 한 곡처럼 묶어서 부르는 멋진 기획이었다. 우리에게 기타란 최고의 장난감이었으므로 학원 강습을 마친 이후 늦은 밤까지 남아서 곧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도 그러할 것이다. 데미안 라이스를 듣고 있자니, 당장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그날의 풍경이 눈앞에 있을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나. 합주실을 나서는 우리는 삼십 대의 생활인이 된 각자의 모습을 그려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D와 S는 원하는 연봉을 받으며, 원하는 직장에서,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러다 간혹 두 곡의 노래를 하나의 노래로 겹쳐 부르던 그 밤이 떠오를 때면, 기타를 안고선 데미안 라이스의 무드를 되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무드를. 서른이라 해도, 마흔이라 해도, 우리가 늙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해도.

데미안 라이스에게는 삶을 더듬는 무드가 있다. 그것은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기타의 스트링일 수도 있고, 거칠지만 여리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영화에서나 어울리는 쓸쓸한 분위기이기도 하고, 커피보다 중독적인 음색의 파동이기도 하다. 밤은 다시 찾아오고, 데미안 라이스는 LP 위를 뱅글뱅글 돈다. 어떤 이유로 앨범 제목을 ‘O’라고 짓게 된 것일까. 언젠가 나는 데미안 라이스를 들으며, D와 S를 생각하는 이 밤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순간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다. 두루뭉술, 대책 없이 살아갈 뿐이다.

한 시인은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 썼다. 단 두 개의 어절이 지난 내 시간을 위로하듯 뭉근하게 안아주는 기분이다. 두 동생도, 두 곡의 노래도,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도, 나의 이십 대도, 소설가가 되고자 했던 열망도 모두 그러하기를.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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