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일깨우는 두가지 큰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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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일깨우는 두가지 큰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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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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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철이 돌아왔다. 코로나19도 대한민국의 입시를 이기지 못한다. 입시는 한국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좌표이기 때문이다. 신문은 온통 유명 대학의 인기 있는 학과의 경쟁률과 합격 점수를 다투어 게재한다.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40여년 전, 당시 학력고사라고 불리던 대학 입학시험을 치웠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A4용지 3분의 1 크기에 적힌 학력고사 점수를 보고 지구 핵으로 떨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친구들과 만나 축구하고 등산하기 좋아한 내가 좋은 점수를 받을 리가 없었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른한 가슴 아림과 함께 약간의 현기증이 올라온다.

대학은 부모 집을 떠나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업을 모색하는 실험장이다. 교수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찾아 나선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격려하는 도우미다. 교육이란 자신과 상관없는 지식을 효율적으로 암기시키는 강요가 아니라, 그 학생의 성향을 파악해 그에게 어울릴 만한 다양한 직업이나 취미를 소개하고, 취사선택하게 유도하는 친절이다. 교육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에듀케이션(education)은 그 학생이 지닌 유일무이한 특성을 밖으로(e-) 유도하는(ducation) 체계적인 자극이란 의미다.

교육은 개개인 맞춤교육일 수밖에 없다. 서구에서 의무 공공교육의 도래는 귀족들의 향유였던 지식을 대중에서 널리 펼치는 현대 문명과 문화의 기반이자 진보라고 칭송받았다. 인간은 누구나 공평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학식, 지적인 능력, 그리고 그것에 어울리는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이 낙관적인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공공교육의 역사와 그것이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면, 그 주된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다.

공공교육의 목적은 각기 다른 개인의 역량의 발굴이 아니라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사회 제어 수단이었다. 그 목적은 자기 삶의 목표를 발견하도록 자신이 환경에서 알게 모르게 얻는 편견을 깨우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한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평균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개인이 지닌 개성이나 독창성은 놀림과 제거의 대상이다.

그런 의무강제교육은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시작됐다. 스파르타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돼 군사교육을 받았다. 스파르타 아이들에게 덕이란,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나아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의 군인들과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닌 다양한 분야를 갖춘 현대 공공교육 시작은 16세기 독일이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대중교육 교재로 사용했다. 그는 당시 독일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공의무교육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는 행정당국이 국민들을 학교로 보낼 것을 주장합니다... 만일 정부가 시민들을 창과 총을 드는 군사훈련을 강요하고 유사시 군 복무를 시키는 것처럼, 시민들의 자녀들을 학교로 보낸다면, 우리 도시들과 공국들을 비밀리에 파괴하는 악마와 (지적으로 영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습니다.”

루터는 국가 공권력을 이유로 한 의무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을 루터교 교리를 주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많은 독일 공국들은 최초의 공공학교를 세웠다. 루터는 현대적인 공공교육을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이 교육을 통해 특정한 세계관을 주입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현대 공공교육의 또 다른 축은 18세기 초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빌헬름 1세다. 북독일 연방의 의장이며 독일제국의 황제였던 그는 프로이센을 일등국가로 개조하기 위해 1717년 전국적인 의무교육을 시작했다. 루터의 공공교육이 공권력을 이용한 주입교육이라면, 빌헬름 1세의 공공교육은 동일한 시민을 생산해 내는 공장식 학교교육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초중고 학교 건물은 공장 모양이다. 학교는 공장처럼 직사각형이며, 교실은 정사각형, 복도는 선형이다. 선생은 교실 맨 앞 강단 위에 서서 학생들에게 정보를 주입시키고 암기를 강요한다. 선생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계단식 교실의 아래 중앙에 있거나, 평면식 교실의 맨 앞 단위에 서서 지식을 전달한다.

공장식 교육 모델은 동일한 교재(국정교과서), 국가고시, 과정보다는 점수 획득, 질문보다는 해답, 진리 탐구보다는 권위에 복종, 혁신이나 진보보다는 획일과 정통을 우선 가치로 삼는다. 프로이센에 효과적이었던 이 모델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한 귀족교육 중심이었던 미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후, 다시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전파돼 주요 교육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 교육자이자 스탠퍼드대학의 교육 행정 교수였던 엘우드 패터슨 커벌리는 1916년 ‘공공교육행정’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교육은 공장들이다. 가공되지 않는 원료들(어린이들)이 다양한 삶의 요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런 제조를 위한 구체적인 조건은 21세기 문명의 요구에서 결정된다. 학교가 할 일은 이 구체적인 조건에 맞게 학생들 개조하는 것이다.” 공공교육자들은 99% 학생들을 로봇으로 봤다. 개성을 제거하고 사회가 과학적이며 효율적이라고 결정한 공공교육을 수용하고 따른 것이 최상의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를 이렇게 비판한다. “학교는 당신이 사회가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광고 대행업체다.” 20세기가 낳은 400명의 천재들의 교육과정을 다룬 ‘세계적인 인물들을 어떻게 교육되는가’라는 책은 5명 중 3명, 즉 60%가 학교교육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학교교육을 송장이나 견딜 수 있는 복종을 요구한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학교교육은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게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폭력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창문이 없는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선생이 하는 말을 유심히 경청하고 진리라고 무조건 수용하는 극기를 훈련한다.

교육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의 순응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서서히 조각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학생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은닉된 독창적인 영혼을 일깨워 정답이 없는 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자기 나름의 정답을 더듬도록 격려하는 친절이다.

그것은 삶의 여정에 자신만의 독보적인 지도를 만들도록 응원하는 배려이며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영적인 인간으로 서서히 만드는 인내다. 교육은 인생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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