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인과 JFK 주니어, 그리고 조 바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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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과 JFK 주니어, 그리고 조 바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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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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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국제면을 휙휙 넘기다가 도쿄발 기사 제목에 그만 눈길이 ‘턱’ 걸렸다.

“바이든·스가 위해… ‘케네디 딸’이 움직인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관계 구축을 위해 캐롤라인 케네디 전 주일미국대사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캐롤라인 케네디는 35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존 F 케네디(1917~1963)의 딸이다. 캐롤라인 케네디는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3년부터 미국대사로 일본에 부임해 4년간 도쿄에 주재했다. 나는 캐롤라인 케네디(1957~)가 주일 미국대사로 일본에 부임했다는 뉴스는 접했지만 그 이후 소식들은 알지 못했다.

스가 총리는 관방장관 시절 매달 한두 번씩 캐롤라인 대사와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며 신뢰를 쌓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 가지 일화. 2019년 5월, 스가 관방장관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캐롤라인은 그를 자택으로 초청했다. 캐롤라인은 한자로 레이와(令和)라고 쓴 케이크를 특별히 준비해 스가 장관을 맞았다. 레이와는 나루히토 일왕 즉위 이후 일본에서 사용되는 연호다.

내가 코로나로 ‘집콕’하면서 유투브로 자주 들었던 팝송 중 하나가 닐 다이아몬드가 부른 ‘스윗 캐롤라인’이었다. 이 팝송을 따라 부르다 보면 기분이 좋아져 잠시나마 코로나 블루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스윗 캐롤라인’이 히트하자 캐롤라인이 ‘캐롤라인 케네디’를 지칭한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캐롤라인의 이름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의식의 심연에 침전해 있던 JFK와 얽힌 단편적인 조각들이 일제히 떠올라 머리에서 윙윙거리다 아이언맨의 수트처럼 ‘착착착’ 합체되어 형체를 만들어갔다.

아버지 장례식의 세 살 아들

미국인은 한 장의 사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1963)이 암살 사흘 뒤에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1963년 11월25일. 하루아침에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는 어린 두 자녀와 함께 남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영결하는 아내. 비통(悲痛)을 드러내지 않는 재키. 영원히 떠나는 아버지에게 알 듯 모를 듯 경례를 하는 세 살 아들. 이날은 아들의 세 번째 생일이었다. 이 사진은 1960년대의 상징적 이미지로 평가된다.

서른네 살 한창인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여인 재클린 케네디(1929~1994). 세상을 뜬 지 30년이 되어 가지만 미국인에게는 재키는 여전히 마음속의 퍼스트레이디이자 패션의 아이콘이다.

재키는 뉴욕 토박이로 월가에서 주식 중개인이던 존 부비어의 딸로 태어났다. 워싱턴DC의 조지워싱턴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의 사진기자가 된다. 기자로 활동하던 중 한 파티에서 동료 기자의 소개로 매사추세츠 하원의원이던 존 F 케네디를 만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1953년 결혼한다. 미모의 저널리스트 재키 부비어와 전 영국대사의 아들이자 현직 상원의원인 존 F 케네디의 결합. 두 사람의 결혼은 신흥 명문가의 탄생이었다.

첫딸 아라벨라를 유산으로 잃고 얻은 딸이 캐롤라인. 셋째인 아들 패트릭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떴다. 1960년 11월 25일,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2주 뒤에 세상 빛을 본 아들. 부부는 ‘존 F 케네디 주니어’로 이름을 지었다. 영아기를 넘긴 케네디 부부의 자녀는 캐롤라인과 JFK 주니어 남매뿐.

1963년 존 F 케네디가 사망했을 때 재키 나이는 서른네 살. 혼자 살기에는 너무도 젊고 아름다웠다. 남편이 죽자 재키는 워싱턴DC를 떠나 고향인 뉴욕 맨해튼으로 이사한다. 남편이 자동차 옆자리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본 아내.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설상가상으로 믿고 의지하던 시동생 로버트 케네디(1925~1968)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도중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만 되면 당선이 확실하다던 로버트였다.

재키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다. ‘누군가 케네디 집안을 또다시 공격한다면 그다음은 내 자식들이 될지도 모른다. 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재키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을 떠났다.

불안과 우울의 나날이었다. 그런 재키 앞에 한 남자가 다가갔다.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1906~1975). 보호자가 필요했던 재키는 오나시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1968년, 이오니아해에 있는 오나시스의 개인 섬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딸 캐롤라인이 엄마의 재혼에 들러리를 섰다. 이렇게 그녀는 재클린 케네디에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되었다. 재키는 스콜피오스 섬과 남매가 학교에 다니는 뉴욕을 오가며 결혼 생활을 했다. 뉴욕에서 재키는 여러 곳에 집을 얻어 딸과 아들을 보호했다. 이런 결혼 생활은 1975년 오나시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남긴 유일한 아들 JFK 주니어. 아버지를 쏙 빼어 닮았지만 JFK 주니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JFK 주니어는 늘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브라운대학 졸업 후 그는 연극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연극배우를 반대해 오래 하지는 못했다. 연극계를 떠난 그는 뉴욕대 로스쿨에 진학한다. 로스쿨 재학 중인 1988년 그는 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가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는 한동안 뉴욕 지방검찰청 검사로 근무했다. 그는 잡지 표지모델로 등장해 ‘현존하는 미국 남자중 가장 매력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잘생기고 커리어도 좋았으니 정치권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남편과 시동생의 비극을 지켜본 재키는 “정치는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1994년,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재키가 65세로 타계했을 때 나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었다. 나는 그때 ‘토론토 스타’지를 구독 중이었는데, 캐나다 언론에서 재키의 타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마치 현직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 별세한 것처럼 크게 취급했다.

정치 명가의 유전자를 타고난 JFK 주니어는 현실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대신 언론인의 길을 택했다. 어머니와 이별한 다음 해인 1995년 그는 정치 전문월간지 ‘조지’(George)를 창간해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다. ‘조지’ 미국의 건국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에서 따왔다. 조지는 창간 직후부터 주목을 받아 매월 50만 부 이상을 찍는 영향력 있는 잡지로 급성장했다.

서른여섯이던 1996년 그는 캘빈 클라인 컬렉션 초대전에서 캐롤라인 버셋을 만난다. 버셋은 캘빈 클라인의 홍보 담당 직원이었다. 그는 여배우 데릴 한나와 사귀던 중이었지만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버셋에게 매력을 느낀다. 버셋은 능력도 뛰어났지만 패션 감각도 탁월한 여성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자 언론은 ‘가장 뉴욕스러운 커플’이라고 평했다. 두 사람의 ‘힙’한 일상이 거의 매주 신문과 잡지에 실렸다.

1999년 7월 16일. 사촌여동생 로리 케네디의 결혼식이 보스턴에서 열렸다. 로리 케네디는 1968년에 비명에 간 숙부 로버트 케네디의 막내딸이었다. 그는 아내 버셋과 함께 경비행기를 몰고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러나 뉴욕 근처 롱아일랜드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얼마 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비행기가 대서양에 추락해 아내와 함께 사망한다. 서른아홉 살. 그가 숨지자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커버스토리로 올렸다. 모든 언론은 이렇게 썼다.

‘케네디가의 비극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JFK 주니어는 1999년 2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 방문은 정몽준 의원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정몽준 의원 부부가 JFK 주니어와 만나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JFK 주니어는 4박5일간 머물며 연세대에서 특강을 했고 울산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를 둘러보기도 했다.

JFK 주니어가 사망하고 난 뒤, 나는 정몽준 의원과 취재 때문에 만난 일이 있다. 무슨 얘기를 나누다 내가 “예전에 JFK 주니어를 만나신 일이 있지요?”라고 물었다. 그때 정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JFK 주니어는 지금까지 내가 본 남자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였습니다. 어떻게 남자가 그렇게 잘생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사고로 그렇게 갔어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워싱턴DC 외곽에는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케네디 대통령 일가의 묘지다. 재키는 케네디 대통령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그 곁에 태어나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딸 아라벨라와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생후 이틀 만에 사망한 아들 패트릭이 있다. 케네디 대통령 가족묘에서 가까운 곳에 로버트 케네디와 에드워드 케네디가 영면 중이다.

조 바이든 시대가 막을 올렸다. 바이든 대통령이 젊은 시절 정치에 뜻을 품고 동경한 인물이 JFK와 로버트 케네디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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