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딩크형, 미안해요 하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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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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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월드컵 멤버 중 한 사람이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영표다. 그는 강원 FC 대표이사이기도 하다.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 김남일 성남FC 감독, 박지성 전북 현대 어드바이저….

서울 광화문과 전국을 붉은 함성으로 물들였던 한일월드컵. 한일월드컵 20주년이 1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때 녹색 그라운드를 폭풍처럼 질주하던 태극전사들은 세월이 흘러 나잇살이 붙은 중년의 남자로 변했다. 일부는 지도자로 그라운드를 지휘하고 있고, 일부는 축구 행정가로, 또 어떤 이는 축구 해설가와 방송인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 축구는 바야흐로 2002 월드컵 멤버의 성공 경험을 공유하는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스페인을 꺾고 4강행이 확정되던 날 밤, 나는 서울 홍대 앞 삼거리에 있었다. 늦은 밤, 원고 마감을 끝내고 광화문에서 홍대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때 택시 기사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앞으로 살아생전에 이렇게 기쁜 날이 또 올까요?”

택시 기사의 말대로,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날이 앞으로 또 올 수 있을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월드컵 4강은 코리아의 브랜드 가치를 단숨에 올려놓았다. 세계 어디를 가도 ‘월드컵 4강 코리아’를 기억한다. 축구 마니아라면 2002 월드컵의 주요 경기를 열거하며 엄지를 편다.

16강에서 이탈리아, 8강에서 스페인을 잇따라 격파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월드컵 4강은, 삼성전자가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격상시킨 것처럼 세계축구의 변방 코리아를 주목하게 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는 데 성공한 경우다. 스포츠 경기에서 홈그라운드 이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그러나 홈그라운드라고 해서 개최국이 모두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공동 개최국이었던 일본은 16강에 그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 개최국 러시아는 8강에 머물렀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월드컵을 유치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장·피파(FIFA) 부회장의 공로다.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월드컵 4강은 8할이 거스 히딩크 감독의 리더십 덕분이다. 히딩크가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정점에 올라와 있을 때 개최국 감독으로 영입한 것은 축구협회의 ‘신의 한 수’였다. 히딩크는 전략적 마인드로 팀을 이끌었다. 선수에게 화를 낼 때도 감정적으로 하는 법이 없었다. 몇 수를 내다보고 전략적으로 질책했다.

2002월드컵이 끝나자 히딩크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몇몇 여행사에서 유럽여행 관광객을 모집하면서 코스중에 ‘히딩크 고향 방문’을 부각하기도 했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선수들의 눈높이를 월드 클라스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선수들은 비로소 유럽 선수에 대한 지긋지긋한 콤플렉스를 털어버렸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수 있게 다리를 놓아준 사람이 히딩크다. 프리미어리그 맨유 유니폼을 입고 질주하는 ‘산소탱크’ 박지성을 보며 축구 스타의 꿈을 키운 소년이 현재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이다.

우리는 히딩크를 통해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조금 이해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그는 흑인 여자친구 엘리자베스와 동행하곤 했다. 부인이 아니라 여자친구였다. 우리는 이 커플을 통해 네덜란드에서는 결혼하지 않고도 부부와 똑같이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참고로 네덜란드는 동성부부를 인정한 최초의 나라다.)

히딩크는 영어가 유창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영어는 기본이고 불어나 독일어를 하나씩 할 줄 안다. 유럽 각국에서 가톨릭의 핍박을 피해 모인 신교도 국가인 데다 무역이 생존의 필요충분조건이었던 결과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히딩크의 나라로 각인되었다.

370년 전, 조선에 온 사람

네덜란드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으로 얽힌 나라다. 2002월드컵이 있기 350년 전, 유럽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1630~1692). 그가 쓴 보고서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책으로 출간된 것이 1668년이다. 책 제목은 ‘스뻬르베르 호의 불행한 항해 일지’였다. 제목이 길다 보니 줄여서 ‘하멜 보고서’로 불렸다. 2년 뒤인 1670년에 프랑스어판이, 이후 영어판과 독일어판이 잇달아 나왔다.

네덜란드어판 이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멜 보고서’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하멜 보고서’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길래.

17세기 말은 유럽 열강들이 해외 영토 개척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뛰어들던 시기다. 그 선각자가 네덜란드였다. 유럽에서 가장 먼 동양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중국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오래전부터 서양에 알려졌지만 조선은 미지의 나라였다.

‘하멜 표류기’로 통하는 이 책의 네덜란드판 원제가 ‘스페르베르 호의 불행한 항해 일지’였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 이 원제가 모든 것을 함축한다.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서기였다. 17세기 해양강국 네덜란드는 북미, 아프리카, 아시아로 진출해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 식민지 중에서 가장 넓은 땅이 지금의 인도네시아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바따비아(자카르타)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총독을 파견해 동양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1653년 6월18일, 하멜을 포함한 선원 64명은 바따비아에서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포르모사(대만)를 향해 출항했다. 이 배에는 포르모사로 새로 부임하는 신임 총독이 타고 있었다. 스페르베르 호는 7월16일 포르모사에 도착했다. 이 배는 7월30일 포르모사 총독의 명령으로 야빤(일본)으로 출항한다. 야빤의 낭가사께이(나가사키)가 최종 목적지였다.

스페르베르 호는 야빤으로 가는 도중 폭풍우를 만나 중국 해안과 포르모사 해안 사이를 표류하다 8월15일 어떤 곳에 표착(漂着)한다. 64명의 선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36명.

선원들은 그곳이 일본이기를 희망했다. 일본 사람을 만나면 낭가사께이로 보내달라고 할 참이었다. 며칠 뒤 그들은 그곳이 북위 33도32분에 자리한 껠바에르츠(제주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일단의 조선인들과 만났다. 선원들과 조선인들은 손짓과 발짓을 총동원했지만 의사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13년간 지속된 강제 억류의 시작이었다.

억류 경험을 일지에 기록한 하멜

선원들은 얼마 후 네덜란드 말을 하는 붉은 색 수염을 기른 한 남자를 만난다. 이십여 년 전 조선에 표착해 정착한 얀 얀스 벨더프레이(박연)이었다. 선원들은 그를 통해 왕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낭가사께이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왕에게서 돌아온 것은 ‘우리가 새라면 일본으로 날아갈 수 있지만 어떠한 외국인도 이 땅에서 내보낼 수 없다’라는 대답이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이었지만 조선왕조 500년은 바다가 있으나 마나 한 사실상 내륙국가였다. 연안에서 바닷고기를 잡는 게 전부였고, 수평선 너머 대양은 낭떠러지였다. 왕과 고관들이 보는 지도에는 외국은 중국 너머 시암(태국)까지만 나와 있었다. 하멜은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1년에 세 번 공물을 받으러 오는 청나라 사신과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다.

하멜은 왕의 자비로 야빤으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탈출을 꾸민다. 이것이 하멜이 박연과 다른 점이다. 하멜은 배 한 척을 사서 선원 7명과 함께 탈출해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13년28일 동안의 조선 억류가 이렇게 끝났다. 좋은 대우를 받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노예 생활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1년간 머물며 13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그동안 부재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조선에서 쓴 일지를 바탕으로 ‘임금 청구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13년간 겪은 일을 쓰다 보니 조선의 정치와 풍속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인에게는 모든 이야기가 놀랍고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보고서라는 게 딱딱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만 표착, 억류, 탈출이라는 3대 극적 요소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적절한 윤문이 가미되었고 눈길을 끄는 삽화가 들어가면서 이 책은 ‘탐험기’처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다. 조선은 이렇게 유럽인에게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하멜이 표착한 서귀포 용머리 해안에는 하멜 기념관과 하멜상선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도 여행의 명소 중 하나다.

하멜 보고서의 부제는 이렇다.

‘네덜란드령 인도 총독 요안 마에츠싸이꺼르와 평의회에 바침’.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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