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보고서'에 드러난 조선 집권층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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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보고서'에 드러난 조선 집권층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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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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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역전마라톤대회. 1955년에 시작된 이 마라톤 대회의 공식명칭은 부산~서울 대역전경주대회. 전국의 육상 선수들이 시·도 대표로 참가하는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다. 보통 11월에 열린다.

코스는 부산시청 앞 광장을 출발해 7일간 밀양~대구~김천~대전천안~서울~파주 임진각까지 국도를 달린다. 총연장은 532㎞. 구간별로 여러 명이 소 구간을 나눠 달린다. 제1구간 부산~밀양(83.6㎞)의 기록은 4시간10여 분대.

한국마라톤의 전성기이던 1990년대 경부역전마라톤대회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TV 스포츠뉴스 시간에 구간별 우승팀과 종합우승팀을 비중 있게 보도하곤 했다. ‘한국 육상의 문화재’라고 평가받는 경부역전마라톤대회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자꾸만 오버랩되는 미스터리 같은 사건이 있다.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13일. 일본군 제1군 1만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나타났다. 4월14일부터 일본군이 부산성을 공격하면서 7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산이 이틀 만에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후속 부대를 합류시킨 일본군은 22만은 4월18일부터 한양을 향해 세 갈래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중 주요 진격로가 바로 경부역전마라톤대회의 코스였다.

선조는 사흘이 지날 때까지 일본군의 침략 사실을 알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조정은 이일과 신립에게 군대를 ‘모집해’ 저지 명령을 내린다. 두 장군은 한양에서 사흘간 병력을 ‘모아’ 대구에서 적군과 싸우기로 하지만 무위로 끝났다.

경상에서 충청으로 오는 길은 단 하나. 새재, 즉 조령(鳥嶺)을 지나는 길. 문경새재는 가파르고 길이 좁아 적을 저지할 수 있는 최적의 요새였지만 병사를 모으는 데 실패한 신립은 조령을 포기한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부산을 출발한 일본군이 받은 최초의 저항이었다. 신립은 궁수 부대로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놀란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탄금대 저지선은 허망하게 뚫렸다. 신립은 자결을 선택한다.

이후 일본군은 한양까지 그야말로 트레킹하듯 진격했다. 선조는 일찌감치 파천(播遷)을 결행했고, 한양은 20일 만에 적군에 함락되었다.(모든 자료에 20일이라고 나와 있다)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임진(壬辰)년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도로상태가 어떠했을까. 경부역전마라톤 대회는 포장된 국도를 달린다. 마라톤 팬츠만을 입고 페이브먼트를 내닫는다. 지원 차량이 따라붙으면서 수분도 공급받는다. 건장한 청년들이 이렇게 6일을 달려야만 도착하는 곳이 서울이다.

문경새재를 가본 일이 있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 코스가 조령을 넘는 길이다. 경상도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상경할 때도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다. 조령 성문을 통과해 저 멀리 문경 방면을 내려다보며 조선 시대 이 새재를 통과하려면 보통 고역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미쳤다. 그런 험한 고갯길을 일본군이 넘었다.

저항다운 저항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산 넘고 물 건너 산책하듯 한양성에 입성한 일본군. 마라톤 선수들이 교대로 달려야 6일 만에 다다르는 서울을 무장한 왜군들은 불과 20일만에 이르렀다. 무협지에나 나오는 축지법(縮地法)을 쓴 것도 아닐 텐데. 불가사의 그 자체다.

선조와 집권층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20일만에 도읍지를 적군에 헌납했다. 이런 조선의 집권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450㎞ 거리를 적군 보병이 3주만에 주파하는 경우가 세계 전쟁사에 또 있을까. 고대 로마의 아피아 가도(街道)를 따라 진격한 것도 아니었는데. 명나라에서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조선이 왜군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의심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서기 하멜의 13년 억류 기록인 ‘하멜 보고서’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상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조선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불편한 진실을 대하니 오랜 불가사의가 풀렸다.

하멜의 기록은 효종 4년인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의 모습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의 조선이다. 왜놈이라고 경멸하던 일본에 당하고 다시 30여 년 뒤 북방 오랑캐 청나라에 짓밟힌 조선 백성들. 조선 집권층은 어떤 각성을 했을까. 하멜은 먼저 양반과 노비제도와 관련해 언급한다.

“…모든 양반들은 노비들과 마찬가지로 왕이나 혹은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 외엔 어떠한 의무도 없다. 백성의 반 이상이 여기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만약 평민 남성이 여자 노비로부터 아이를 갖거나 혹은 평민 여성이 남자 노비로부터 아이를 갖게 될 경우, 그 아이는 노비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노비 부모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경우 이 아이는 노비 주인의 소유가 된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양반과 남자 천국이다.

“남자는 그의 부인이 몇 명의 아이를 낳았어도 내쫓을 수 있고 다른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으나, 여자는 판결에 의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한 다른 남자를 맞아들일 수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부인을 여종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찮은 잘못으로도 내쫓는 수가 있다….”

관료들의 부패상도 빼놓지 않았다.

“모든 수령들의 임기는 1년이며, 다른 관리들은 지위에 상관없이 3년마다 교체된다. 그들 대부분이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기 전에 쫓겨난다.”

관료 사회에서는 매관매직이 성행한다.

“승진의 증서는 왕으로부터 받는다. 이러한 승진 때문에 젊은 양반들이 늙었을 때는 가난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진 증서를 받기 위해 그들은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그들이 지불해야만 하는 기부금 마련에 때로는 재산이 부족하고, 그 비용은 지불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기부금이라고 표현했지만 승진 뇌물이다. 제례의식과 장례문화에 대한 묘사와 서술은 빈틈없이 정확하다.

“모든 자식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3년,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2년을 애통해해야 한다. 그 기간에 승려처럼 음식을 먹으며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된다. 부모가 죽으면 직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즉시 자신의 일을 포기해야 한다. 더 이상 여자와 잠자리도 할 수 없으며 만일 그 기간 안에 아이를 얻으면 사생아로 간주한다….”

하멜은 박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기술한다. 정묘호란이다.

“네덜란드 사람 벨떠프레이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청나라가 얼음 위를 건너와서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숲속에 들어가 목매달아 죽은 것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적군에게 맞아 죽은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살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조선 관리들이 백성을 착취하고 나랏돈을 빼먹고 매관매직하는 사례들은 ‘하멜 보고서’ 말고도 수두룩하다. ‘하멜 보고서’를 읽다 보면 조선은 머리와 상체만 발달하고 하체는 빈약해 거의 기능을 못 하는 기형적 신체 구조를 가진 나라를 연상시킨다. 하멜의 기록은 17세기 중반 조선 인구 1200만명 중 30~40% 노비였다는 사료와 거의 일치한다. 노비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다. 세종은 노비제의 기틀을 놓았다. 고려 시대에도 있던 주인에 대한 노비의 법적 권리를 없애버린 이가 세종이다. 조선을 ‘양반 천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에서 군역은 양인(良人)에게만 주어졌다. 천인(賤人)과 승려는 군역에서 면제되었다. 군역을 피할 방법은 널려 있어 군역 비리가 만연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조정에서 군인의 월급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정은 상비군을 유지할 재정 능력이 없었다. 이래저래 군인이 자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다. 상비군 수는 세조 때 8만으로 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로 하향세를 거듭해 1만200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대부분은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양성에는 임금을 지키는 몇백의 근위병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성에 무혈입성한 배경이다.

여기서 기원전 5세기의 마라톤 전투로 가보자.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이 맞붙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은 어떻게 병력이 1.5배 많은 페르시아군을 격파할 수 있었나. 아테네군은 자유인이었고, 페르시아군은 노예였다. 아테네군은 내 가족의 자유를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했다. 정신 무장에서 페르시아 노예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양성이 20일, 평양성이 60일만에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베이징의 명나라 조정에서 했다는 말을 다시 상기해본다.

“조선이 왜군의 앞잡이가 되었다.”

양인은 관리들에게 학정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수시로 괴롭힘을 당하는 백성들. 왕실과 양반만 잘살고 백성은 도탄에 빠진 나라 조선. 적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의 생명을 지킬 군대를 보유하지 못한 조선. 세종·성종을 비롯해 성군(聖君)이 즐비했다는 조선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다산 정약용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1817년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썼다. 저술 의도를 밝힌 ‘방례초본인’(邦禮草本引)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백 가지 제도가 무너져 일이 어수선하게 되었다. 터럭 한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다.” 조성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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