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도시,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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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도시,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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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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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일의 도·시·공·감
도시 발전의 방향성을 말하는 표현 중 최근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이른바 ‘포용도시’이다. 포용이라 하면 보통은 개인의 덕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한 사람의 넓은 아량과 인덕을 이야기하는 의미로서 많이 쓰인다. 그런데 이 표현이 도시에 붙는다면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 이해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정착하여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도시라고 한다면 자연히 ‘포용도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국적도 고향도 따로 없이 세계 어디라도 삶터가 될 수 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그런 매력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이 표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하지만 도시 발전의 모토로 격상된 곳은 역시 유엔 기구였다. 2016년 해비타트 3차 회의에서 공식 어젠다로 채택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 표현과 관련된 전개과정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다. 특히 이 어젠다가 떠오른 이후의 유럽 상황이 그러하다. 유럽연합이 포용정책을 표방하면서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난민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영국에서 그랬다. 늘어나는 난민들과 주택이나 일자리를 다투어야 하는 노동계층의 반발이 심해진다. 결국 ‘브렉시트’로 불리는, 영국인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유럽연합 탈퇴로 이어진다. 그 여파로 유럽연합에 남은 나라들에서도 수용정책에 반발하는 정당들이 줄줄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런 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포용이라는 개인으로는 고상해 보이는 덕목이 사회적으로 적용될 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 상부를 이루는 계층이야 부드러운 미소로 이민자, ‘난민들을 모두 포용하자’라고 쉽게 외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난민, 이민자들과 삶의 영역을 나눠가져야 할 하위 계층이나 문화충돌을 겪을 수 있는 그룹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한쪽에서의 ‘포용’이 다른 쪽에게는 ‘박탈’의 위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유사한 상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한 유명 배우가 중동 내전지역에서 유입되는 난민을 포용할 것을 호소하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여기에 대해 ‘난민을 당신 집에나 수용하라’라는 식의 날이 선 비판이 많았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반발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나타났었다. 개인 차원이라면 일견 매정해 보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사회적 반응으로 본다면 충분한 이유가 있기도 하다. 개인의 포용과 사회적 포용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차원이라면 너그러이 받아주자고 하면 끝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포용은 다른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흔들 수도 있는 변화인 것이다.

결국 포용이라는 것도 사회 생태계에 대한 이해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태계의 가장 안쪽, 제일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 거하는 종들에게 있어 포용은 별 부담이 아니다. 초식동물들이 대거 초원으로 유입된다고 해서 생태계 정점에 있는 사자가 위협을 느낄 리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자의 생태적 지위는 더 확고해진다. 하지만 당장 이들과 풀을 나누어야 하는 기존 초식동물의 입장은 어떨까. 당장 생존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동물 생태계의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라고 해서 이런 점에서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싫든 좋든, 우리 사회도 이런 생태계의 구조를 닮아 있다. 그러기에 계층 사다리의 가장 아래에 삶터를 가진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난민 사랑’보다도 먼저 진행되어야 할 포용의 모습이 아닐까. 난민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부담이 전혀 없을 계층에서 앞장서 포용을 이야기한다면 책임 없는 감상이 될 뿐이다.

내부적 포용이 없이 외부적 포용만 강조한다면 되면 이는 위선적이다. 우리 사회 내부에도 양극화와 지역불균형이 가속화되면서 취약 계층의 폭과 깊이가 커지고 있다. 역사상 최초로 ‘아버지보다 가난한 아들 세대’의 탄생을 앞두고 있는 지경에서, ‘세대 소외’ 현상도 당장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이미 우리 내부의 ‘난민’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용이라면 당연히 이런 내부의 소외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어야 할 것이다. 유엔에서 제시한 포용도시 개념도 원래는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취약집단의 상황과 형편을 이해하고 돕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변의 취약집단을 보지 못한 채 지구 저편으로만 눈을 돌리려 한다면 그건 포용이 아닌 배제가 될 수도 있다.

김주일 한동대 공간환경 시스템 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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