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나이팅게일, 홀로도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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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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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견제하려 44국 협의체 만든 우크라이나 대통령’

‘크림반도 반환목적 크림플랫폼(Crimea Platform) 국제회의 출범’

신문을 넘기다 큰 사진과 함께 국제면 톱으로 실린 이 기사에 눈길이 고정됐다. 사진 설명의 제목은 ‘우크라이나 독립 30주년 행사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

알려진 대로 우크라이나는 공산권 붕괴 이후인 1991년 소비에트 연방(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유럽사를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그중 폴란드,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체코, 슬로바키아가 대표적이다. 모두 러시아와 이웃하거나 가까운 나라들이다.

언젠가 우크라이나 이야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독립 30주년 기사와 마주쳤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력은 독특하다. 최고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이었다.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된 젤렌스키가 지금, 2014년 러시아에 빼앗긴 크림반도를 되찾겠다고 외교 전략 프로젝트를 가동시킨 것이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대생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나 의사윤리강령을 제창한다.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일생을~~~”로 시작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 것처럼 간호사들도 임상 실습을 처음 시작하기 전 비슷한 선서식을 한다. 나이팅게일 선서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영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이름 앞에는 ‘백의(白衣)의 천사’ ‘광명의 천사’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 ‘군 의료개혁의 선구자’ 등의 형용 어귀가 붙는다.

플로렌스는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유하고 교양있는 영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둘째 딸에게 태어난 도시명을 이름으로 주었다(피렌체의 영어명이 플로렌스다). 태어난 직후 영국으로 돌아간 자매는 영국에서 자랐다. 나이팅게일은 언니와 함께 홈스쿨링을 받았다. 아버지는 자매에게 역사, 수학, 철학, 문학, 이탈리아어를 가르쳤다. 자매는 홈스쿨링을 통해 또래들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게 된다.

1838년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떠난다. 당시 유럽 상류사회에서 유행하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일종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던 중 나이팅게일은 파리에서 영국 출신 작가로 살롱을 운영하던 마리 클라크(1793~1883)를 만난다. 마리 클라크는 나이팅게일에게 여성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이것은 비범한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즈음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천직이 간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 사람은 27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났지만 평생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한다.

여성으로서 나이팅게일은 지적이면서 매력적인 외모였다. 특히 웃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고 한다. 여러 남성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시인이면서 정치인이었던 리차드 밀네스가 장장 9년간 그를 따라다녔지만 나이팅게일은 끝내 청혼을 거절한다. 결혼을 하면 천직인 간호 일에 전념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간호사 교육을 받고 런던의 한 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일하던 나이팅게일은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읽는다. 얼마 후 그는 결단을 내린다. 자원한 간호사 38명과 함께 전장(戰場)으로 간다.

크림전쟁(1853~1856). 제정러시아의 남하(南下)정책을 저지하려는 영국·프랑스·오스만 투르크 연합군이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격돌한 국제전이다. 제정러시아는 크림전쟁에서 패하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나이팅게일은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에 야전병원을 차려 후송된 환자들을 돌본다. 나이팅게일은 여러 가지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해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학살사(史)

이 지점에서 크림반도의 지도를 보자. 우크라이나 남쪽에서 흑해로 돌출해 있는 반도가 크림반도다. 지정학적으로 흑해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다.

크림반도의 역사는 기구하다. 13~18세기 동안 크림반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편입돼 있던 타타르 왕국 땅이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결과 1783년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병합되면서 러시아에 귀속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대로 이 반도는 크림전쟁의 전장이 되었다. 크림반도의 처참한 역사는 2차 세계대전 초기에 또 한 번 반복된다. 크림반도를 차지하려는 나치에 맞서 소련군은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1941~1942년 250일간 전투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크림반도를 독일에 내주고 만다. 러시아 영화 ‘세바스토폴 상륙작전’의 배경이다.

1944년 독일의 기세가 꺾이자 소련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앙갚음을 자행한다. 크림반도에 거주하는 타타르족 20만명을 우랄산맥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킨다. 타타르족이 나치 점령기간 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에서다. 타타르족은 강제이주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역사와 정확히 겹쳐져서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저지른 만행은 타타르족 강제이주가 끝이 아니었다. 더 끔찍한 비밀이 공산 체제 속에 은폐되어 있다가 소련이 붕괴된 이후인 1991년 전모가 드러나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홀로도모르(Holodomor). 우크라이나 말로 ‘굶주림 살인’이라는 뜻이다.

1932년~1933년 스탈린은 명령을 내렸다.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징발해오라’.

붉은 완장을 찬 공산당들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며 식량을 약탈해갔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에 대한 이동을 금지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즉결 처형이 이뤄졌다. 꼼짝없이 앉은 자리서 굶어 죽어야만 했다. 굶주려 죽은 시신들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스탈린이 이런 지시를 내린 배경에는 소비에트의 식량 부족 이유 외에도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우크라이나의 독립 움직임을 사전에 제거해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포석이 깔려 있었다는 분석이다.

2006년 우크라이나 정부는 25개국이 참여해 진행한 UN조사를 공식 발표했다. UN조사에 따르면 1932~1933년 먹을 게 없어 굶주려 죽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700~1000만명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대학살. 홀로도모르. 언론이 통제된 소련에서 이 사실은 60년 가까이 밀봉되었다. 1926~1939년 러시아의 인구증가율은 16.9%, 벨라루스는▽ 11.7%였던데 반해 우크라이나는 6.6%에 불과했다.

홀로도모르를 서방에 최초로 알린 사람은 영국 기자 가레스 존스(1905~1934).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으로 프랑스·독일어·러시아어에 능통한 존스 기자는 소련을 드나들며 트로츠키 부인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1932년 소비에트 연방인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존스 기자는 다시 우크라이나로 들어가 취재를 통해 그 참상을 보도한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일관되게 부인해왔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이 보도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1929년 뉴욕발 대공황 이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환상이 커진 상황이었다. 지상낙원을 건설해 완전 고용을 이뤘다는 소련의 선전은 천상의 복음처럼 달콤했다.

우크라이나 전역 대도시에는 홀로도모르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폴란드, 독일, 미국, 캐나다의 주요 도시에서도 홀로도모르를 기억하자는 추모비를 만나게 된다. 바르샤바, 뮌헨, 윈저, 위니펙, 리자이나, 에드몬튼, 캘거리, 시카고, LA···. 2015년 미국 국립공원청과 우크라이나정부는 워싱턴 D.C. 중심가에 홀로도모르 추모벽을 세웠다. 이 추모벽의 이름은 ‘밀밭’.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2014년 탱크를 앞세워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시켰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금 러시아에 빼앗긴 크림반도를 뒤찾으려 반러시아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의 학살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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