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설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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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설 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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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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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鎬壽/편집국장
 
 설 연휴가 여러 날이어서인지 올 설 연휴엔 유난히 해외로 나가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명절에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는데 이제는 내놓고 “조상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공항으로 나선다. 그게 그리 어색하지가 않다. 한때는 콘도에 모여 차례를 지낸다고 해서 조상이 어떻게 콘도를 찾아오느냐 했었는데 이젠 아예 비행기를 타버리는 형국이다. 그렇게 떠나는 인파가 이번 설 연휴엔 20만8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6일부터 10일까지 하루 평균 4만1710명이 해외로 떠나는 셈이다. 이 새로운 풍조로 인해서 큰집에 가족들이 모이고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일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 있다. 어느 집의 아이들은 이제 설날이 되면 으레 부모에게 이번에는 우리 어디로 여행가느냐고 묻는다고도 하니, 정성들여 차례상을 준비하고 조상을 기리며 우리 고유의 윷놀이 등 민속놀이를 즐기던 설 명절의 의미는 책 속에서나마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10여 년 전의 얘기다. 설을 앞두고 시골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유리창을 닦고 계신 중이라고 했다. 몸도 안좋으신데 힘들게 유리창을 왜 닦으시냐? 하니 객지살이하던 아들, 딸들이 올 텐데 유리창이 더러우면 되냐고 하셨다. 어머님이 사시는 집의 수많은 유리창을 생각하니 다 닦고 나면 몸이 더 아프시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사람을 불러 닦아달라고 하세요!”뿐이었다. 이런 촌에 누가 유리창을 닦으러 오겠느냐, 하신다. 어린 시절에 설 무렵이 되면 어머니는 어느 볕 좋은 하루를 잡아 집안의, 문짝이란 문짝은 죄다 떼어내 물로 씻어내고 햇볕에 말린 뒤 풀을 쑤어 새 문종이를 바르셨다. 문이 많은 집이어서 떼어낸 문짝들이 담에 쭉 기대진 채 마르고 있는 걸 보게되면 `아, 설날이 오는구나’여겼다. 집안에 식구들도 많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어머님이 문종이를 바를 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는지. 어머니는 또 어찌 혼자서 풀비를 들어 마치 난을 치듯 쓱쓱 창호지에 풀칠을 한 뒤 말끔해진 문짝에 척척 바르셨는지.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훨씬 지난 지금의 나는 엄두조차 나지 않을 일을 어머니는 마치 손가락을 접어보는 간단한 일처럼 해내셨다.
 어린 나도 묽은 풀이 담긴 양동이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휘휘 저어보는 장난질을 쳤던 것 같다. 문에 붙일 새 문종이를 혼자 맡아 다 하는 와중에도 어머니의 낭만이 발동하는 순간이 이었다. 어느 순간 풀비를 드신 채로 어머니가 나를 불러서 해안가에 갓 피어난 동백꽃잎을 따오게 하셨다. 그 동백꽃을 따라 대문을 나서 골목 지나 개울 지나 신작로로 나서 고모 댁까지 다녀왔던 그런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 수많은 문짝 문고리 바로 옆에 반듯하고 예쁜 꽃잎 두 장을 마주보게  편 뒤 그 위에 창호지를 덧발랐다. 어차피 그 자리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타는 자리라 창호지 한 장을 덧발라야 되는 자리였다. 어느 문짝은 꽃잎 다섯 장을 펼쳐놓고 바르기도 하셨다.
 참 예뻤다. 어린애가 손가락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구멍이 숭숭 나거나 창호지가 찢어진 문을 두고는 명절을 맞이하기가 그랬던 어머니로서는 새 문종이를 바르는 일이 설맞이이며 식구들이 감기 들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도 당신의 낭만을 찾아내는 것도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문고리 옆에 붙여진 동백꽃잎은 설이 지나고 새봄이 올 때 까지도 그 자리에서 식구들과 함께 보내곤 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 집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창호지를 발라야 하는 문짝 대신 유리창이 달린 새집이 지어졌다. 설날만 오면 옛집의 문종이를 풀칠하시던 그때의 어머님이 문득 생각난다.
 어머니 혼자서 집안의 문짝을 떼어내 물로 씻어내던 일이, 창호지에 풀칠을 하던 일이,  내가 따다 준 동백 꽃잎을 그 투박한 손으로 창호에 대고 바르게 펼치고서 무엇을 기원하듯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눌러주던 모습이 설날이 다가오면 되살아난다. 지금 살아계셨으면 풀비가 유리 닦기로 바뀌었어도 마음은 그대로 이실 것이다. 추석이나 설 명절 긴 연휴만 오면 차례도 성묘도 제쳐두고 “조상님 잘 다녀오겠습니다”인사도 없이 언제든 비행기를 탈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는가.
 조상을 기리는 세시풍조가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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