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를 대하는 대통령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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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를 대하는 대통령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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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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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평균적인 교양 수준을 가늠하는 몇 가지 지표가 있다. 1인당 연평균 몇 권의 책을 읽느냐, 하루에 신문을 읽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공공도서관 1관당 인구수 등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표다.

천재 연구가로서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 ‘당대의 건축가를 대하는 대통령의 태도’다. ‘대통령’을 그 시대의 권력자나 수도의 시장, 혹은 상징적인 존재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필립公과 김대중 前 대통령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26~2022)이 9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영국 여왕은 1년 전 먼저 간 남편 필립공(에딘버러 공작·1921~2021)과 하늘나라에서 재회하게 됐다. 현존하는 한국인 중 외교관을 제외하고 필립공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은 류춘수 이공건축 회장이다. 류 회장은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리츠칼튼호텔, 한계령휴게소, 박경리기념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16일. 류 회장은 영국 런던의 버킹엄 궁전을 예방했다. 필립공이 그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필립공은 도서관에서 류 회장을 만나 15분 동안 환담을 나눴다. 같은 시각 버킹엄 궁전의 다른 접견실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줄리 앤드루스를 접견하고 있었다.

한국 건축가는 어떤 경위로 필립공의 초청을 받았을까. 그는 2000년 3월부터 3개월간 ‘듀크 에딘버러 펠로우’로 초청되어 케임브리지대학에 머물면서 강연과 여행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가 케임브리지대 처칠컬리지 숙소에 도착한 직후였다. 버킹엄궁에서 전화가 왔다.

“필립공이 귀하를 만나고 싶어한다. 언제가 좋겠느냐. 오는 5월3일, 16일, 18일, 24일 중에서 편하신 날짜를 한 달 이내에만 골라 달라.”

그는 16일을 택했다. 그가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케임브리지대 기숙사에 도착하니 버킹엄궁에서 온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에는 ‘5월16일 오전 11시 궁전으로 들어오라’는 내용과 함께 드레스 코드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었다.

그는 5월16일 오전 11시 버킹엄궁 도서실에서 필립공을 15분간 만났다. 그는 필립공에 자신의 작품집 드로잉북과 유럽 여행 중 그린 그림을 선물로 전했다. 그는 영국 여왕의 부군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2개월 전에 날짜 4개를 주고 선택하도록 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필립공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 아닌가.

그가 필립공을 처음 만난 것은 1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4월,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여왕과 동행한 필립공은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 월드컵경기장 부지, 인천공항, 비무장지대(DMZ) 등을 둘러봤다.

영국은 축구 종가(宗家)다. 필립공은 서울 체류 기간 중 상암월드컵경기장의 건설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현장을 찾은 필립공에게 그는 방패연을 보여주며 경기장 설계 콘셉트를 브리핑했다. 그는 자신의 건축 철학은 전통과 하이테크의 결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때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1년 뒤 ‘듀크 에딘버러 펠로우’로 초청받은 것이다.

2001년 11월16일, 상암월드컵경기장 준공식 행사가 열렸다. 방패연 디자인 지붕을 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월드컵경기장이 공개되는 그날 VIP석에 류 회장, 고건 서울시장, 정몽준 축구협회장,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등이 자리를 잡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축사를 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시장, 축구협회장 등을 치하했지만 설계자인 류 회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다른 VIP들이 더 당황했다. 작가의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축사를 하는 외빈(外賓)이 주인공인 작가를 빠트리는일이 벌어진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책을 많이 읽었다는 김 대통령이 이런 결례(缺禮)를 범했다.

△ 프랑스국립도서관 개관식의 페로와 미테랑

고 프랑수아 미테랑 (1916~1996) 프랑스 대통령. 그는 15년 재임 기간 중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문화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랑 프로제’란 문화강국 프랑스를 세계에 알리는 건축 프로젝트를 말한다.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의 유리 피라미드, 국립도서관(BnF), 라데팡스가 이 시기에 세상 빛을 봤다.

나는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2017)을 쓰면서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취재한 일이 있다. 프랑스국립도서관 내부를 살피다가 사진 한 장을 보고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5세기 루브르박물관 리슐리에관(館)에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서적과 자료들이 늘어나고 이용객들이 증가하면서 공간이 비좁아졌다. 신축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프랑스 문화부는 1988년 국립도서관 신축 공모전을 열었다.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1953~)의 설계안이 당선되었다. 그게 1989년. 페로 나이 서른여섯.

1995년 3월30일, 역사적인 BnF 개관식 행사가 열렸다. 미테랑 대통령은 도미니크 페로와 앞줄에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행사장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오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찍혔다. 두 사람 뒤로 파리시장, 문화부장관, 국립도서관장 등이 줄을 섰다. 일흔아홉 살의 대통령이 마흔두 살의 건축가와 동등하게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의 발걸음을 얼어붙게 했다.

△건축가 70명과의 약속을 두 번 취소한 시장

2012년 1월, 서울시는 공공건축가 70명을 선발했다. 류 회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공공건축가 지명식 행사가 불과 하루 앞두고 돌연 취소되었다. 서울시는 박원순 전 시장이 다른 일정으로 바빠서 지명식 행사가 연기되었다고 했다.

지명식 행사 일정이 다시 잡혔다. 그런데 이 역시 하루 전에 별다른 이유 없이 취소되었다. 세 번째 날짜를 잡고 나서야 박 시장과 건축가들이 만났다.

류 건축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그날 박 시장은 중요 일정이 있었지만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면서 “시장이 언론인들과의 만남을 불과 하루 앞두고 두 번씩이나 취소할 수 있겠느냐, 그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느냐”고 말했다.

도미니크 페로는 이화여대 ECC를 설계한 사람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설계한 사람이 이화여대 ECC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놀랍기만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 30년간 서울에 지어진 건축물 중 최고는 상암월드컵경기장과 이화여대 ECC라고 생각한다. 페로는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테랑은 현장 감독 같았어요. 스무 번 넘게 공사장을 다녀갔지요. 감시가 아니라 관심이었어요. 격의 없이 우리 사무실에 들렀답니다. 부탁은 딱 하나. 임기 끝나기 전에 완공해달라는 거였죠.(웃음) 미테랑은 건축가의 대통령이자 문화건설자였어요.”

건축 설계사는 사람은 크리에이터(creator)다. 기존의 것을 융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왜 프랑스와 영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강국으로 상찬되는가. 크리에이터를 제대로 대우하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 도시가 배출한 천재들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천재들이 흔적을 남긴 건축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건축물에 관련된 기본적인 정보를 얻으려면 영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건축물들을 설명하는 글의 앞부분에 반드시 ‘건축가 OOO가 설계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정신문명의 선진국에서는 설계자 이름을 맨 앞에 기록한다. 어떤 경우도 시공사의 이름이 강조되는 경우는 없다. 시공은 창의성이 요구되는 분야가 아니다. 시공은 설계 도면대로 1㎜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독일 베를린에는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이 있다. 전 세계의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중에서 단연 압권이다. 2711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이곳에서 10분만 걸어보면 오감으로 느껴진다.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당해야 했던 고통이.

이 추모기념물은 콜 수상의 결단으로 세상에 나왔다. 콜은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최종 설계안 두 개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고심 끝에 공모를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 공모전에서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1932~)의 설계안이 채택되었고, 2005년 지금의 추모공원이 태어났다.

현재의 서울시청은 장소성·시대성·합목적성에서 혹평을 받는다.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신청사 최종 설계안 두 개가 그에게 올라갔다. 오 시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류걸씨의 청사 설계안을 낙점했다.

대통령이나 시장은 공공건축물의 설계안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권한을 갖는다. 어느 것을 고르느냐. 순간의 판단에 도시의 표정이 바뀐다. 그 안목은 인문적 교양에서 나온다.

조성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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