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정치와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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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정치와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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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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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전쟁 등 여러 가지 국내외적 요인으로 국가 재정이 부족해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헨리 8세는 당시 통용되던 은화를 주조할 때 은의 함량을 90%에서 30%로 낮추었다. 액면가는 똑같은 주화이지만 은의 함량이 낮아지게 되자 시민들은 은의 함량이 높은 주화는 집에 보관하고 은의 함량이 낮은 주화만 사용하였다. 결국 시장에는 은의 함량이 낮은 주화만 통용되었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가 왕권을 이어받을 즈음에는 은의 품귀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재정 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샴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기서 양화는 ‘은 함유량’이 많은 좋은 주화이고, 악화는 ‘은 함유량’이 적은 주화이다. ‘구축’은 몰아내거나 쫓아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질이 떨어지는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경제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던 이 용어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을 쫓아내고, 나쁜 행위가 좋은 행위를 몰아낸다는 비유로 많이 사용되는 이 표현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언론과 정치판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이다. 먼저 언론부터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방송사의 핵심 요직에 같은 성향의 인사들을 꽂아 넣으며 재빠르게 언론을 장악했다. 곧바로 반대 성향을 지닌 기자나 직원들을 갖은 핑계를 대어 쫓아내거나 한직으로 내몰았다.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이나 능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내 편이냐 아니냐만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부터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팩트에 기반한 객관성이나 공정성은 사라지고 부풀리거나 왜곡한 편파·편향 보도 일색이었다. 어떤 경우는 선동에 가까웠다. 이런 언론들의 행태는 5년 내내 지속되었다. 국민은 격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몇몇 특정 언론은 ‘언론의 자유’라는 방패 뒤에 숨은 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편파성과 왜곡이 더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은 언론의 보도를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유튜브로만 몰려든다. 편향된 몇몇 특정 언론이라는 악화가 언론의 공적 기능이라는 양화를 몰아내어 언론계 전체가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는 어떠한가. 협치라는 단어는 이미 오래전에 국회의사당 의원들의 구둣발에 밟혀 죽었다. 매일 불꽃 튀는 설전을 벌이는 정치인들의 눈빛과 표정을 보더라도 여야 간 서로 얼마나 혐오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주먹질은 차마 할 수 없으니 말로서라도 상대를 때려눕히겠다는 태세다. 야당은 여당을 구태의연하고 케케묵은 꼰대 집단으로 치부하고, 여당은 야당을 향해 내로남불, 편 가르기, 독선과 거짓, 위선적인 집단이라 여기며, 무조건적 반대와 악착같은 인신공격, 극렬한 상호 비방이 난무한다. 이런 정치행태로 인해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라는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이되어 국민마저 극도로 분열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여와 야, 좌와 우는 아웅다웅하면서도 결국 같이 가야 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이글대는 적개심으로 쓰러뜨려야만 될 상대로 여긴다. 그러니까 화합하고 협력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굴복시켜 이겨야 할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이 상태를 지속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결국 승자는 없고 국가만 위태로워진다. 지구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극심한 내부분열이 국가가 멸망한 주요인이었으니까.

소망 없어 보이는 정치와 언론, 사회풍토를 바라보며 미래의 대한민국 존립 자체가 걱정될 지경이다. 걱정을 넘어 비애를 느낀다. 대체 우리는 얼마를 더 기다려야 국민화합, 더 나은 미래, 더 부강한 국가를 위해 여야가 서로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정쟁이라는 악화를 몰아내고 화합과 협력이라는 양화가 이 나라 정치에 자리 잡게 될까. 이철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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