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詛呪)
  • 모용복국장
저주(詛呪)
  • 모용복국장
  • 승인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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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풍경
남을 해코지하기 위한 저주는
사회질서 파괴하는 범죄 행위
신부들 SNS에 대통령 전용기
추락 염원 저주 글 파문 확산
생명존중 성직자의 자세 아냐
극단 치닫는 우리사회의 단면
얼마 전 후배 기자가 말했다. “저, 빨간색 볼펜으로 이름을 적으면 안 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업무 도중에 급하게 이름을 적는다는 게 색깔을 살피지 않고 얼른 볼펜을 집어든 모양이다. 나는 검은색 볼펜으로 다시 바꿔 잡으면서 속으로 ‘젊은 친구가 별 걸 다 가리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는 건 금기(禁忌)였다. 어릴 적 멋모르고 빨간 색으로 이름을 썼다가 부모님에게 혼난 기억이 선명하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적으면 피가 마른다고 했던가? 아니며 부모님이 죽는다고 했던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근원이 불명확하지만 어쨌든 무서운 저주(詛呪)다.

저주는 다른 이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닥치기를 기원하는 주술행위다. 우리 민속에서는 주로 ‘양밥’이라든가 ‘방’이라는 말로 쓰였다. 남을 향한 시기심이나 앙심이 저주를 낳게 되며, 남을 대하는 파괴적 공격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남을 해치는 행위인 일종의 ‘해코지’인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선시대 궁중에서 저주와 관련한 사료들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도 조선 숙종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사약을 받고 숨진 장씨를 포함해 저주를 위한 주술행위한 사람은 무서운 형벌을 면하지 못했다. 그만큼 남을 해코지하는 저주는 과거부터 인간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악랄한 범죄행위로 치부돼 왔던 것이다. 오죽하면 돈에 눈이 멀었거나 사이비 무당이 아닌 바에야 무당들도 저주를 목적으로 비방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거룩한 일을 행하는 신부들이 사람을 해치는 글을 SNS에 올려 파문이 일고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우리나라 대통령을 향한 저주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대한성공회 대전교구와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신부들이다.

성공회 신부는 지난 14일 동남아를 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 전용기 추락을 염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그는 SNS에 “암담하기만 하다.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온 국민이 ‘추락을 위한 염원’을 모았으면 좋겠다. 인터넷 강국에 사는 우리가 일시 정해서 동시에 양심 모으면 하늘의 별자리도 움직이지 않을까”라고 썼다.

논란이 확산하자 대한성공회 대전교구는 이날 해당 신부의 사제직을 박탈했다. 대전교구는 사목교서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제로 인해 분노하고 상처받은 이들에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제는 사제가 아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앞서 지난 12일 천주교 신부도 자신의 페이스북 게시물에 대통령 전용기에서 윤 대통령 부부가 추락하는 사진을 합성해 게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신부는 해당 사진에 항의하는 댓글에 대해 ‘반사’(거부)라고 대응해 더욱 공분을 사고 있다. 그는 논란이 확산하자 자신의 SNS 계정을 폐쇄했다.

성직자들도 정치적인 소신을 갖고 사회운동을 통해 그것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소신을 넘어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고 상대를 해코지하는 저주를 퍼붓는다면 그는 이미 성직자가 아니다. 누구보다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성직자가 대통령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탑승한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종교는 우리사회 도덕규범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堡壘)요, 성직자는 그 보루를 지키는 문지기다. 그런 성직자의 입에서 타인을 해하는 저주의 말이 쏟아진다면 우리에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어쩌면 이번 일은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 간, 진영 간 첨예한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 단면인지도 모른다.

이 뿌리 깊은 양극단의 현상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 극단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용복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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