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꽃가피'
  • 뉴스1
이태원의 '꽃가피'
  • 뉴스1
  • 승인 2022.1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이 없기로는 꽃이 제일이다. 잎이 엽록소 공방을 마감하고 울긋불긋한 본색을 드러낸 지 여러 날이 지났고 가지마다 참한 겨울눈을 달아 내년 살림을 시작하는데 마른가지 끝에 아직도 꽃을 달고 있는 관목들이 더러 보인다. 가까이 가 보면 무려 계절을 지나도 한참 지난 봄꽃들이다. 노래가 끝난 악보에 잘못 새긴 음표처럼, 한없이 정답던 그이의 식은 마음처럼 생뚱맞고 느닷없다가 종내 처연하다. 철모르고 피어 철없이 노래하는 십일월의 봄꽃은 천연덕스러운가, 미련스러운가.

밀란 쿤데라는 저서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티티새가 숲에서 도시로 터전을 옮겨온 것에 대해 ‘보헤미아에 누가 살건, 러시아인들이 어디를 정복하건 지구는 아랑곳하지 않지만 티티새가 자연을 배반하고 인위적인 세상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지구로선 너무도 큰 일’이라고 역설했다. 개량종도 많아 계절을 건너뛰는 일쯤 흔한 마당에 꽃 한 송이 철없이 핀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한 달 넘게 떨어질 줄 모르는 뒷산의 영산홍을 보면서 마음이 치받는 건 꽃과 죽음의 어떤 인과 때문이다.

전해 내려오는 풍습 가운데 꽃가피가 있다. ‘꽃갚이’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꽃가피로 쓰이는데 간혹 꼬까비로 부르기도 한다. 유래에서 알 수 있듯 꽃을 갚는 일을 말한다. 봄이 되어 영산홍의 동속이기도 한 진달래가 피면 마을의 젊은 처녀 총각은 꽃을 한 송이씩 꺾어 아직 떼가 마르지 않은 새 무덤으로 갔다. 채 피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젊고 어린 영혼들에게 꽃을 바치기 위해서다. 땅 속에 묻혀 다시 볼 수 없을 창창한 봄을 누리기가 면구하여 길가의 꽃 한 송이로 빚을 갚고자 했던 마음, 매해 새로 피는 붉은 꽃을 바쳐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노라는 약속, 거기서는 부디 아프거나 외롭지 말라는 당부로 꽃을 놓았다.

붉은 화살처럼 가슴에 박히기는 꽃이 제일이다. 꽃은 극적으로 태어나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낱낱이 시들어간다. 동백처럼 후드득 떨어져 한동안 자태를 유지하는 꽃이 있는가하면 진달래처럼 가지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땅에 이겨지는 꽃도 있다. 피어서 꽃이듯 반드시 시들어야 꽃이다. 무서리 내리기까지 보름 남짓 남았을 이 계절은 식물에게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한다. 막바지 에너지를 그러모아 겨울을 견디는 일이 최우선과제다.

하물며 철모르고 피어 드문드문 가지 끝에 매달린 이것은 꽃이 아니다. 영문을 모르는 낙오의 증거다. 떨어질 시점을 잃어 메아리로 남은 어떤 이름이다. 오래 전 젊은이들이 죽은 자의 이름 부르는 대신 꽃을 놓는 이유는 목청이나 몸짓으로 부르는 이름은 우렁차지만 가볍고, 눈물은 금세 마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멸될 것이 두려워서였다.

아무도 아닌 이들에 의해 들춰지고 무람없이 불리어져버린 십이구참사의 이름은 십일월의 봄꽃처럼 끝내 증거로만 남아있다. 꽃잎으로만 울고 있다. 안은영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