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최강 순례자’ 싸리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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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최강 순례자’ 싸리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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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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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었다. 선명한 빗자루의 흔적이 데크 계단부터 산의 입구까지 이십여 미터쯤 정갈하게 이어져있다. 매일아침 낱알 하나 없이 비질이 된 산책로를 걸으면서 구청이나 환경단체에서 ‘처리’하는 일로 추측했다. 매일 뒷산의 낙엽을 쓰는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루 만에 수북해지는, 노동의 수고에 비해 가치는 떨어지는 비효율의 작업이다. 공무가 아니라면 잠깐의 비질 만으로도 허리가 뭉근해지는 노동을 누가 자임하겠나.

떨어지는 낙엽의 양 또한 여간하지 않았다. 이곳은 이파리 한 장이 초등학생 머리통만한 오동나무와 양버즘나무, 도토리거위벌레의 수작으로 작은 가지째 낙엽이 지는 상수리나무나 떡갈나무, 선녀 옷처럼 잎이 할랑이며 떨어지는 아카시 나무와 계수나무 등 교목부터 쥐똥나무, 국수나무, 찔레 같은 관목들이 진을 치고 있는 오랜 숲이다. 비록 초입의 임도이긴 해도 이 길을 매일, 그것도 한 사람이 치우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날은 하필 이른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예전보다 일찍 나서기도 했거니와 날이 궂어서인지 인적이 없었다. 바로 그 때 데크길에 쓱- 싸락 쓱- 싸락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비질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날에도 나와서 ‘공무 처리’를 하시나보다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한 눈에도 불편해 보이는 한쪽 다리를 끌면서 초로의 아저씨가 길다란 싸리비로 낙엽을 쓸어내고 계셨다. 예의 낱알 하나 없이 정갈한 길! 이 분이셨구나.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엉켜들어 인사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숲으로 잰 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이후로 두어 차례 싸리비 아저씨와 마주쳤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건네면 아저씨는 빗자루에만 시선을 둔 채 예, 하고 짧게 대꾸할 뿐이다. 한번은 조금 떨어진 정자에 앉아 그가 비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정한 보폭과 팔꿈치의 각도만으로 연결된 움직임은 간결하고 리드미컬했다. 굽혀지지 않는 한쪽 다리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숨 쉬듯 동작을 연결했을 뿐인데 길은 그림처럼 말끔해졌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한편 집중적이어서 잡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보였다. 비질은 아저씨가 하는데 머릿속 잡념은 내가 비워지는 기이한 체험을 한 것도 같다.

삶은 당면한 문제들을 쳐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반복이다. 그것이 순례가 아니고 무엇일까. 신념, 목표, 마음, 열정 같은 만져지지 않는 단어들을 죄다 쓸어내고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 그리하여 멀리서 헤매는 내 정신을 되찾아오는 것. 싸리비아저씨는 알고 있을 것이다. 비질 한 번에 큰아이 취업걱정, 비질 두 번에 이역만리 멀어진 부부사이 걱정, 비질 세 번에 취미도 돈도 없이 노후를 어떻게 버틸지 걱정하다보면 어느새 하루치 잡념을 싸리비가 날려준다는 것을. 이따금 보다 젊은 남자분이 가세하는 걸로 보아 머지않아 싸리비 순례에 동참하는 동네 분들이 점점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한 우리의 손톱과 머리카락과 걱정거리는 쉬지 않고 자란다. 손톱은 일주일에 한 번, 머리카락은 보름에 한 번, 걱정은 매일아침 몸을 움직여 날려버리기를. 우리 동네 최강 순례자 싸리비아저씨에게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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