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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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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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어어엉, 덩어어엉. 경주박물관에 성덕대왕 신종이 운다. 웅장하고 기묘한 소리가 끊길 듯 이어지면서 길게 누운 저녁노을 속으로 퍼져나간다. 집채만 한 쇳덩어리가 내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품격있는 맥놀이는 숨을 죽이고 마음의 귀를 열게 한다. 보폭 좁은 초겨울 바람이 이리저리 빗질해도 흔들림 없이 생각 여문 소리를 낸다.

신라 범종은 그 형태가 아름답고 섬세하다. 종의 선線이 위에서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항아리처럼 다시 안으로 모인다. 일정한 소리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되살아 나는 신비한 소리는 ‘Korean Ball’이라는 학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렇듯 세계 제일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지축을 흔드는 천둥 같은 시간 속에서도 잠잠히 종의 무게를 버티고 견딘 용뉴의 희생 덕분이 아닐까.

용뉴는 범종梵鐘의 가장 위쪽 천판天板에 있는 종뉴로 용의 모습을 한 고리를 일컫는다. 종의 정상을 두 발로 딛고 머리를 숙여 종의 몸체를 물어 올리는 듯한 용뉴, 구부린 용의 몸통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루鐘樓나 종각鐘閣 천장에 달린 고리에 건다. 우리나라의 상원사 범종과 성덕대왕 신종이 세계에서 가장 신비한 종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수만 근이나 되는 범종을 용뉴가 거뜬히 걸어 매고 용케 지탱하였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범종은 타종의 진동으로 음파를 만들어 낸다. 이때 용뉴가 지탱력이 부족하여 온전히 종의 무게를 버티거나 배겨내지 못하면 종의 중심이 흔들리거나 주저앉게 된다. 용뉴가 제 몫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면 둔탁한 쇳소리는 낼 수 있겠지만, 널리 퍼지는 그윽한 맥놀이는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종의 중량이 깎은 듯 가파른 절벽에서 천년을 홀로 지새운 마애불의 업만큼 무거워도 용뉴는 기척 없이 걸어 매고 내려놓을 수 없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무게의 과업이다.

우리 삶에서도 한 집안의 가장은 용뉴와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나 혼자서 어린 자식들과 부양해야 할 병든 노부모를 짊어진 외벌이 가장의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머리 위에 넓적한 고인돌을 떠받치고 걸어야 하는 삶의 무게는 적잖은 공포심으로 다가온다. 한순간이라도 가장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구기박질러 버리면 졸지풍파에 온 가족이 순장되기도 한다.

얼마 전 안타까운 뉴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사십 대 가장이 아내와 열 살 된 딸과 동반하여 세상을 떠난 일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붉어질 틈도 없이 보풀 털 같이 별이 되어버린 어린 생명은 가장이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생긴 순장의 풍습 같은 죽음이라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애달프게 했다.

나는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과 가족이 탄 배를 혼자서 힘겹게 끌었던 가장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 한참 어린데 가장이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퇴직은 나에게 공포의 무게로 짓눌려 왔다. 평온했던 내 삶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쳐졌다. 두 아이의 밥과 옷을 위해 등골에 소금꽃이 피었고 가슴 속에서는 화농의 상처가 더께로 굳어졌다. 기세 푸르던 내 열망들은 눈곱만큼도 없이 사라지고 수시로 돋아나는 뿔을 다스리며 수년 동안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어야 했다.

그즈음에야 나는 잔주름 성성한 아버지 얼굴에 여기저기 핀 물기 말라버린 검버섯이 가장의 무게를 견딘 생의 악보인 걸 알았다. 등걸잠과 노루잠을 자면서 한숨 섞어 부르던 목쉰 노랫가락이 식솔을 등짐으로 짊어진 아버지의 경전 읽는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평생 식구의 밥줄을 위해 전전긍긍하며 사느라 움츠러든 아버지의 야윈 어깨는 가족의 목숨줄이 줄줄이 걸린 용뉴였다.

햇살 빗겨 간 옥상 빨랫줄에 나무의 단단한 뿌리 같았던 남편의 바지가 축 늘어져 걸려있다. 날마다 각 맞추고 줄 세워 달음박질하던 마라토너 같던 삶이 고단했을까. 솔기는 미어지고 무릎은 툭 불거져 이제 그 역할을 다해간다. 두드리기만 하면 뭐든 나오는 도깨비방망인 줄 아는 가족들을 둘러매고 용뉴처럼 그 무게를 견디던 남편의 추상같던 자존심이 처연하게 매달려 있다. 오래전 아버지의 후줄근했던 바지처럼.

속이 빈 갈대들이 은빛으로 센 머리를 강둑에 펼쳐놓은 겨울, 한 무리의 철새 떼가 강 위를 고깔 대형으로 날아간다. 맨 앞 꼭지의 리드를 따라 저녁노을을 읽으며 바쁜 날갯짓으로 이곳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 멀리서 어스름이 자박자박 걸어온다.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이 다시 길게 운다. 용뉴로부터 그윽이 타고 흐르는 음파가 잔잔한 맥놀이가 되어 노을 품은 강물을 따라 흐른다. 덩어어엉, 덩어어엉.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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